#5. 어린이날을 보내며
2025. 5. 7.

 

 첫 번째 수요일 #5. 어린이날을 보내며

 

 오월의 첫 번째 수요일입니다. 저는 영화제가 한창인 전주에서 긴 연휴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어요. 전주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기도 해요. 오월을 맞아 이번 편지는 특별했던 지난 어린이날의 기억으로 채워보려 합니다.

 

 

 어느덧 타향살이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신발이 닳도록 돌아다녔던 동네는 이제 많은 것이 변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요. 씁쓸한 것은 더는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본가에 들를 때마다 낯선 풍경을 발견하는 일에 적응해야 하고, 가끔은 ‘이 자리에 원래 뭐가 있었지’ 하고 생각합니다. 뭐가 있었는데. 있었는데. 그런 말들을 곱씹다 보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아이의 기분이 됩니다.

 

 어린이날, 전주엔 비가 왔어요. 점심을 함께 먹은 친구는 우비를 사 입고 일하러 떠났고, 저는 영화를 보러 가기 전까지 비 오는 거리를 걸었습니다. 이틀 전 보다가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부서진 파편처럼 머릿속에 남은 영화 생각을 하고, 그 영화를 보고 오래 앓았다는 사람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른그림찾기를 하듯 희미한 기억 속 풍경과 지금 눈앞의 풍경을 대조해 보고. 우산을 써도 맞을 수밖에 없는 비처럼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더듬더듬… 세차게 내리던 비는 어느새 맞을 만한 비로 변해가고 맞을 만한 비는 그치는 게 아쉬울 때가 있죠. 그만 걷고 카페에 가기로 합니다.

 

 

 휴일에 아메리카노를 마시면 어른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이상해.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어쩌다 어린이날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마신 저는 15년 전 개봉한 영화 <혜화, 동>과 브로콜리너마저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혜화, 동>은 15년 전에 개봉한 영화입니다. 포스터엔 ‘스물 셋 혜화의 지난 겨울 이야기’라고 쓰여 있군요. 혜화는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영화 <혜화, 동> 포스터

 

 

 영화는 혜화의 아이와 겨울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제목의 ‘동’은 ‘아이’와 ‘겨울’을 뜻하는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아이와 겨울은 혜화가 지나온 어떤 시절이라는 점에서 유사해요. 그 시절을 지나며 혜화는 어리고 여린 존재들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요. 또, 영화의 말미에선 내가 버린 존재와 나를 버린 존재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어요. 모두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무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혼자 크는 아이가 어디 있겠어요.

 

 

 영화에 대한 감상은 연휴 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시 한 편으로 이어가겠습니다. 지난 4월에 나온 서윤후 시인의 새로운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의 맨 앞에 실린 ‘근하신년’이라는 제목의 시예요.

 

 


 

근하신년

 

 

 새해 첫날 태몽을 꾸었다. 나는 누구의 아이를 대신 낳았을까. 연둣빛 열매를 반으로 가르는 꿈. 좋은 칼을 가졌다는 말을 설핏 들었는데. 도복을 입고 손날을 허공에 날리며 걷는, 갈증을 유독 잘 느끼는 그런 아이를 낳은 것만 같다. 날이 추워져 화분을 방 안에 들이고 다 함께 말라간다. 함께 죽어가는 것에도 기쁨 있어라. 너무 모진 축복이라 죄송해요. 꿈이라서 나는 말한다. 겨울잠도 버리고 간 짐승. 짐승이 내는 소리는 왜 다 우는 것처럼 들릴까. 작년 일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나를 낳고 찾아오지 않듯이. 골목에는 빗자루가 세워져 있다. 오늘은 틀림없이 눈이 올 것이다. 꿈을 거듭하며 축복의 검열관들을 뚫고. 눈송이가 웃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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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615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이번 어린이날 연휴 동안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를 보아서인지,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 길을 걸은 탓인지, 이 시가 마음에 깊게 와닿았어요. 아직 시집을 다 읽지도 않았지만 이 시를 영화와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요.

 

 혜화 이야기를 하기 전, 위에서 언급한 ‘보다가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부서진 파편처럼 머릿속에 남은’ 영화는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입니다. 어젯밤 서울로 돌아와서 처음부터 다시 보았어요. 끊어진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되살아나고, 저는 이 영화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길게 이야기하고 싶군요.

 

 

 아무튼, 이 ‘근하신년’이란 시를 읽으면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 <혜화, 동>의 혜화와 집 없는 개들이 잔상처럼 눈앞에서 맴돌아요. 겨울잠도 버리고 간 짐승. 짐승이 내는 소리는 왜 다 우는 것처럼 들릴까. 영화를 보고 오래 앓았다는 표현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어떤 아이에겐 아이라는 것 자체가 너무 모진 축복이 아닐까. 축복의 검열관들을 뚫고 꿈을 거듭하는 이를 돌아보고,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른이 된 아이로 살아가는 일은 가끔 지치고 힘들지 않나요. 도복을 입고 손날을 허공에 날리며 걷는, 갈증을 유독 잘 느끼는 그런 아이가 내 안의 어딘가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그렇지만 아이도 시절도 다시 오진 않을 것이기에, 소중히 간직한 채 ‘근하신년’의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어요.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다시 저의 어린이날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영화와 공연이 모두 끝난 뒤 늦은 밤 제가 들른 곳이 있어요. 일곱 살 때부터 8년 정도 다녔던 피아노 학원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모습은 변했지만 같은 자리, 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는 학원을 두 눈으로 보았을 땐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더군요. 연휴 동안 전주에 내려가서 변했다는 말을 참 많이 한 것 같은데.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게 감격스러웠습니다. 심지어 학원뿐 아니라 학원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거의 변한 게 없었죠. 아파트, 골목, 지름길, 교회, 주택, 잔디밭, 나무, 오르막길. 언젠가는 변하겠지만 아직 남아 있는 것들. 길을 걷는 내내 수없이 뒤를 돌아보며 저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어린이날을 보내주었어요.

 

 

 

 오월의 첫 번째 수요일에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휴 동안, 그리고 지난 한 달 동안 앓도록 사랑한 노래 한 곡을 엔딩곡으로 전할게요.

 

 자라나는 빛을 담고픈 마음으로

 정수 드림

 

 

 

 

정밀아 - 서울역에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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