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요일 #2.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추위가 몰아치는 2월입니다. 당신은 어떤 겨울을 보내고 계신지요. 겨울은 제가 네 번째로 좋아하는 계절이에요. 움츠러들고 나약해지기 십상이니까요. 그런데 이상해요. 이렇게 추운 계절이 지나고 나면 대개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 건 왜일까요. 얼어붙은 몸과 마음은 잊히고 녹아 스며든 온기가 기억이 되어요.
어쩌면 겨울은 가장 따뜻한 계절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진실한 온기를 생각하기에 참 좋은 추위입니다. 빛을 발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고 긴 밤도 있지요. 당신의 혹한기마저 아름답기를 바라며 책 한 권을 소개하려 합니다.
고명재 시인의 산문집,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입니다.
대체로 스님들은 기약하거나, 함부로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스님들은 말없이 사랑하고 말없이 죽는다. 불가에서 사랑은 그렇게 기척 없다. 쑥을 캐거나 좌복을 펼치듯 단정하게, 고양이 머리를 쓰다듬듯이. 사랑을 사랑 자체로 발휘하는 것. 그러고 그들은 미련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고요히 사랑을 주다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붙잡지 않고 우리는 사랑을 해냈다. 엄청난 고통과 불치병을 몸에 달고도 수십 년 사랑이 사랑을 발휘했다. 그렇게 젊은 비구니가 나를 키웠다.
…(중략)...
가끔 ,스님은 연락도 없이 과일을 한 박스씩 보내곤 했다. 뜬금없이 집 앞에 배가 주렁주렁 열릴 때 나는 그 아름다운 그 금빛을 모조리 기억하려다 그런 색채마저 거두는 게 사랑이라 고쳐 믿었다.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매일 산책하는 강변의 기나긴 길과 일렁대는 강물과 버드나무 줄기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 배앓이를 하듯 자꾸 보고 싶을 때 무채 무채 말하다보면 좀 나아졌다. 죽은 개들이, 인자했던 할머니 손끝이 그렇게 건너온 저쪽, 너머의 존재와 말들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서 쥐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이 사랑도 비울 것이다. 그때까진 용감하게 사랑을 줘야지.
서문 중 일부를 옮겨 적었습니다. 이 책엔 고명재 시인을 키운 수많은 사랑들이 가지런히 담겨 있어요. 그가 쓴 사랑시만큼이나 아름다운 산문들이 쌀알처럼 빼곡합니다. 이번 설 연휴 내내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면서 이 책 생각이 많이 났어요.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저를 키워준 사람의 눈처럼 새하얗던 머리카락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천사
우리가 포옹을 시작하게 된 건 새하얀 날개를, 천사를 경험한 이후였다고 말해도 될까. 너무 아름다워 온몸으로 가두고 싶은 것. 심장과 심장을 최대한 가까이 두는 것. 우리는 이를 ‘부드러운 속박’이라고 한다. 양팔로 당신을 꼭 끌어안았다. 깡마른 날개 뼈가 손목에 닿을 때 나는 당신이 이대로 날아갈까봐 곁에 남아달라고 귓속말했다. 병실에서 당신은 끄덕거렸다. 천사들은 언제나 그런 식이다. 최선을 다해 날개를 집어넣으며 그들은 우리 품에 안긴 그대로 자신이 떠나고 남겨질 우리의 뒤편을 본다.
키우는 사랑이라는 건 참 신기하지요. 기약 없이, 기척 없이. 자신이 떠나고 남겨질 사람의 뒤편을 바라보는 것. 저는 그런 고요한 사랑을 주다 떠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어요. 그렇게 떠나온 곳의 많은 것을 잊은 채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고명재의 글은 너무나도 따뜻하게 다가오네요. 화려하진 않더라도 눈부시게 새하얀, 뜨끈한 쌀밥처럼요.
당신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밥심 같은 것이 있다면 저는 이 책을 전하고 싶어요.
이제, 오늘 소개한 책과 어울리는 노래 한 곡을 전하려 해요.
34회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nardis(나르디스)의 <사랑하나보다>입니다.
nardis - 사랑하나보다
난 너에게 발을 담군다 넌 나에게 손을 뻗는다
바다가 보일줄 알았더니 하늘이 보였다
나 어디에 서있는걸까 네 그림자를 품에 안을 때
깊은 곳에 빠진 줄 알았더니 날 꺼내준 거였다
오 난 어떤 이름이 되어 널 불러볼까
어떤 색의 하늘을 너에게 보여줄까
아 사랑은 무엇으로 전해야하나
아 간지런 이 맘 누가 알아주려나
아 난 너를 사랑하나 보다 아아 난 너를 난 너를
오 나 어떤 세상이 되어 널 피워낼까
아무에게도 지지않는 마음 줄 수 있는데도
아 사랑은 무엇으로 전해야하나
아 간절한 이 맘 누가 알아주려나
아 난 너를 사랑하나보다 아아 난 너를 난 너를 사랑하나보다
난 너를 난 너를 사랑하나보다
난 너를 난 너를
기타와 피아노, 두 사람의 목소리가 이렇게나 사랑스럽습니다. 다채로운 무채색 같은,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좋음이 있어요. 설 연휴 동안 저는 나르디스의 앨범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그리고 눈 내리는 고향 풍경을 바라보면서, 피아노 학원과 외할머니집을 오가던 어린 시절 회상에 잠기곤 했답니다.
‘사랑하나보다’라는 곡에는 꼭 무구한 어린 시절 저의 모습과 저를 키운 사람들의 사랑이 담겨있는 것 같아요. 사람을 키우는 사람의 설렘 가득한 고백 같기도 하고, 사랑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의 다짐과 결의 같기도 해요. 또한 이 모든 게 ‘사랑하나보다’라는 불확실한 말에 담긴다는 것은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기도 하고요. 마음껏 오해해도 좋을 것만 같은 따스한 노래입니다.
남은 겨울 동안 우리, 마음껏 따뜻해져보아요.
나를 키워낸 사랑을 기억해 내는 힘으로 눈 속에서도 움트는 사랑을 키워요.
2025년 2월
정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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