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요일 #7. 초견이 좋아서
안녕하세요. 덥고 습한 여름입니다. 환해지기도 지치기도 쉬워서 다루기 어려운 계절이에요. 더군다나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가니 생각이 많아집니다.
작년 7월엔 그래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여름을 견디는 계절로 받아들이긴 싫어서, 몸을 움직일 구실을 찾아다녔거든요. 그건 정말 잘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 생각이 많아지는 날, 퇴근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운 날이 있죠. 그런 날 피아노 앞에 앉으면 변화되는 어떤 느낌을 저는 사랑해요.
저로서는 온전히 형언하기엔 어려운 감각입니다. 기타를 처음 배울 땐 손가락은 아프고 어렵게 낸 소리가 아픔을 덮어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음악엔 치유의 힘이 있다’라는 말을 믿게 되었는데, 피아노를 말할 땐 조금 다른 표현을 빌리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 <벌새>엔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피아노를 치면 신비로운 느낌, 무력감에 저항하는 손가락의 힘을 느낄 수 있어요.
사실 저는 어렸을 때 피아노를 꽤 오래 배웠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때부터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피아노를 잘 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죠. 정확히는 잘 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해야 할까요. 뭐라도 되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성취가 찾아오지 않을 땐 괴로웠고, 뽐낼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죠.
그래서 그 시절의 피아노는 취미가 아닌 특기를 쓰는 자리에 적혔어요. 지금 사전을 찾아보니 취미란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힘, 감흥을 느끼어 마음이 당기는 멋’을 뜻하는 단어군요. 어린 날의 저에겐 과분한 의미 같아요.
그랬던 피아노가 지금은 취미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게 정말 기뻐요. 좋아할 수 있는 일, 좋아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큰 축복이니까요. 취미와 취향을 넓혀 가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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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각하는 피아노 배우기의 순기능 중 제일은 ‘칭찬’입니다. 제가 만나본 피아노 선생님들은 칭찬을 어찌나 잘하시는지, 주변에 농담처럼 피아노를 배우면 자존감이 상승한다고 이야기하곤 했어요. 일을 하다 보면 긍정적인 피드백만 들을 수 없잖아요. 그리고 우리는 때로 누군가를 알게 모르게 평가하고 비판하죠. 칭찬의 언어를 가득 장전한 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그 순간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가장 기억에 남는 칭찬도 있어요. 바로 “초견이 좋다”입니다. 저는 초견이라는 단어를 피아노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사전에선 ‘악보를 처음 보고, 연습하지 아니하고 연주함. 연주자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기능의 하나’라고 합니다. 처음 배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년 동안 이 말을 많이 들었는데, 이 말만큼 들었을 때 위로가 되는 말이 없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선생님에게서 칭찬이 툭 날아올 때마다 마음속으로는 큰 감동을 느끼면서도 그 이유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네요. 처음 드는 생각은, 보는 눈이 좋다는 말을 내가 듣고 싶었던 게 아닐까. 광고 만드는 일을 하면서 ‘왜 난 보는 눈이 없을까’와 ‘왜 난 보는 눈만 높을까’ 같은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그랬던 것 같아요. 또, 초견이 좋다는 말은 어린 시절의 내가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말 같기도 해요. 아무래도 요즘 <미지의 서울>을 보며 과거의 나를 껴안는 이야기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여기까지가 초견이 좋다는 말이 좋아서 피아노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피아노를 좋아하게 되어서 초견이 좋아진 건지, 정말로 제가 초견이 좋은 사람인지, 칭찬에 진심이 얼마나 들어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졌어요.
개인적인 이야기를 오랜만에 고해성사 하듯이 늘어놓으니.. 수요 없는 공급 같은 이 편지를 일곱 편 째 쓰고 있다는 사실도 제법 흥미로워집니다. 좋아하는 일을 더욱 좋아하고 싶어서 벌인 일이기에, 쓸 생각을 하면 기쁜 마음이 귀찮음을 늘 이긴다는 게 마음에 들어요.
이어서 <귀신 되기>라는 김복희 시인의 시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에요.
귀신 하기
많이 좋아하면 귀신이 돼
복숭아 귀신 곶감 귀신 그런 것이 한집에 둘이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같이 사는 게 귀신이 아니면 조금 어색하다
약봉지가 서랍 하나를 다 채울 정도로 많아지기에
자네, 이제 약 귀신이 되려나 인사했더니
좋아하는 것이 없어 약을 먹기 시작했네, 빙그레 웃었다
좋아는 하는데 귀신은 되지 않으려고 그러네,
몸이 힘들어 약을 먹어야 한다네, 모를 소리를 하고
그러고는 출근해버렸다
퇴근하면서 가끔 술이며 초콜릿을 가져다주기도 하니
소원이 있거나 겁이 많은 친구일 것이다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 귀신이 안 되려고 노력하는 모양이 안됐다
기껏
인간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가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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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시를 무척 좋아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제목이 ‘귀신 하기’라는 것입니다. 많이 좋아하겠다는 다짐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귀신 되기가 아니라 귀신 하기. 말하는 이의 결연한 의지가 묻어나오는 듯합니다.
종종 시를 읽으면 시에 등장하는 인물에 나를 대입해보고 멋대로 상상하고 오해하는 즐거움에 빠지는데요. 이 시에 등장하는 가엾은 친구, 소원이 있거나 겁이 많은,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면서 귀신은 안 되려고 노력하는 이 친구의 모습이 꼭 내가 보듬고 싶은 나의 모습과 닮아있다고 생각해요. 기껏. 인간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가엾다며 읊조리는 애정과 연민이 섞인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오래 머물러요.
당신은 좋아하면서 귀신이 되지 않으려 하는 일이 있나요.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최근 푹 빠진 노래 한 곡을 남길게요.
싱어송라이터 ‘보리’의 정규 1집 앨범 <어린 날의 숲>에 수록된, ‘메아리’라는 제목의 곡입니다. 동요를 연상케 하는 순수한 노랫말이 피아노 선율에 녹아 있어요. 수록된 앨범을 순서대로 들으면 이 곡을 들었을 때 비로소 ‘어린 날의 숲’의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한 기분, 쏟아낸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내가 과거의 나와 공명하는 기분이 들어요.
싱그러운 여름날 숲속을 떠올리며 편안한 마음으로 함께 듣는다면 좋을 것 같아요.
당신께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5년 7월 2일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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