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월의 책갈피
2025. 6. 4.

 

🔖 첫 번째 수요일 #6. 오월의 책갈피

 

 어느덧 유월입니다. 당신은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고 계신가요. 저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며 고독한 동시에 충만해지고 있어요. 이번 봄 동안은 해야 할 일이 거의 없어서 쉬는 날이 많았고, 해야 할 일 대신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할 수 있었죠. 하루하루가 반복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리듬을 갖게 되었고,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살아있어서 좋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일을 쉬어가는 삶이 불안과 무기력을 가져올 때도 있었지만, 값진 휴식이기에 그런 시간조차도 소중하게 써야 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되더군요. 어떤 이야기는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고 어떤 문장은 꼭 붙잡고 놓지 않으려 했어요.

 

 

 이전까지 저에게 책을 읽는 행위는 일종의 강박에 가까웠어요. 창작하는 일을 하면서 인풋에 대한 강박 같은 것을 갖게 되는 건 당연한 과정일까요. 그건 알 수 없지만, 카피라이터 일을 하면 할수록 ‘좋은 책을 더 많이 찾아 읽고 좋은 생각을 자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끝없는 허기로 제 안에 머무르게 되었거든요. 그래서 책을 읽는 시간보다 필사하고 기록하는 시간에 더 많이 매달리기도 하고, 의미보다는 재미에 치중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면 외면해버리기도 하고, 호기롭게 구매한 책의 3분의 1 정도는 읽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어요.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기에, 오랫동안 저는 강박과 갈증을 품은 채 읽는 사람으로 살아왔는데요. 올해 봄, 그중에서도 오월은 특히 이런 생각으로부터 보다 자유로웠던 시간이었어요. 숙제처럼 하던 독서 아카이빙보다 펜으로 휘갈겨 쓴 메모가 많았고, 책 귀퉁이를 접어 둔 페이지가 많았고, 개인적인 금기—책에 펜을 대지 않는다—를 깰 정도로 몰입한 이야기가 많았거든요. 그러면서 ‘도파민 과잉의 시대에 이런 종류의 쾌감은 참 오랜만에 느껴본다’고 생각했어요. 나만의 성을 짓고 그걸 마음껏 허무는 듯한 기분. 놀이터에서 모래를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

 

 

 그래서 이번 편지는 ‘오월의 책갈피’라는 이름으로, 제가 지난 한 달 동안 소중히 간직한 문장들을 나눠 보려 해요. 은근슬쩍 좋아하는 책을 영업하고, 당신은 어떤 문장과 이야기를 끌어안고 살아가는지 궁금해 하면서요.

 

 

 

 

 

 

🔖 1️⃣  김화진 장편소설, 《동경》 중에서

 

아름, 재능은 그런 한 단어가 아니고 그 속에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포함된 단어인데, 네가 만난 사람들과 네가 다한 열심도 거기 들어가.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에 실패했다 해도 재능이 없는 게 아니야. 네가 바라는 성공에 필요한 재능이 없는 거지. 다른 여러 재능은 있을 거야. 그래서 재능은 항상 사후적일 거야. 되고 나야 그런저런 재능이 있었군, 하고 평가할 수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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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에 대하여》를 읽은 후로 김화진 소설을 모조리 사버렸습니다. 세밀한 심리 묘사와 생동감 넘치는 대사가 참 좋아요. 《동경》은 아름, 민아, 해든, 이 세 친구의 이야기인데요. 다른 모습으로 같은 계절을, 따로 또 함께 지나는 세 사람에게 애정과 응원을 보내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가는 사람, 스스로가 ‘애매한 재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건네고 싶은 소설이기도 해요.

 

 우리에게는 재능이라는 말로 일축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가능성이 있고, 그걸 믿어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무수히 많은 미래가 있는 거잖아요. 알고 있으면서도 잊게 되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는, 아름에게 건네는 해든의 저 말이 오월의 햇살처럼 따뜻해서 좋아요.

 

 

 

 

🔖  2️⃣  마음을 미음처럼 

박준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 중에서

 

 미음을 끓입니다 한 솥 올립니다 회회 저으며 짧게 생각합니다 같이 사는 동안 보여주지 못한 나의 수선이 아른거립니다 이내 다시 되작거립니다 채에 받쳐둡니다 아시겠지만 진득하게 남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묽어져야 합니다 고개를 파묻습니다 나는 아직 네게 갈 수 없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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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묵호로 향하는 KTX에서 새로 산 박준 시집을 펼쳤어요. 시집에는 긴 생각을 부르는 짧은 시가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 마음이 가장 오래 머무른 시는 ‘마음을 미음처럼’이라는 제목의 시였어요. 조용한 바닷마을로 혼자 여행을 떠나는 저의 마음을 담은 출사표 같기도 했죠. ‘진득하게 남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묽어져야 합니다’

 

 박준의 시는 슬픔을 언어화하는 탁월한 방식을 지녔다고 생각해요. 어렵지 않게 읽힙니다. 시인이 슬픔을 녹이기 위해 따뜻하게 달구어진 언어를 사용하는 것만 같죠. 그의 시를 읽으면 어떤 이의 부재를 떠올리다가도 어느새 삶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겨집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집의 뒤쪽에 ‘생일과 기일이 너무 가깝다’라는 산문이 참 좋아요. 이 시집과 함께 먼 곳에서 비움과 채움의 시간을 보냈기에, 저의 이번 2박3일 묵호 여행은 더욱 아름답게 기억될 것 같네요.

 

 

 

 

🔖  3️⃣  조해진 장편소설, 《빛과 멜로디》 중에서

 

 알마를 살린 장 베른의 악보와 권은을 방에서 나오게 한 카메라는 결국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둘은 다른 사랑이지만 같은 사랑이기도 하다고, 한 사람에게 수렴되지 않고 마치 프리즘이나 영사기처럼 그 한 사람을 통과해 더 멀리 뻗어나가는 형질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고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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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과 멜로디》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이면의 참혹함, 그것을 딛고 더 멀리 뻗어나가는 사랑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일의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소설이기도 하고요.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했어요.

 

 권은이라는 인물을 살린 것은 어느날 건네받은 카메라입니다. 사진을 찍으면 ‘숨어있던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순간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던 것이죠. 사진을 매개로 이야기는 확장됩니다. 빛이 피사체를 감싸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고통을 감싸는, 한 사람을 살리는 사랑이 한 사람에게 수렴되지 않고 그 한 사람을 통과해 더 멀리 뻗어나가는, 이 이야기를 소중히 간직한 채 살아가고 싶어요.

 

 

 

 


세 권의 책에서 한 부분씩만을 가져오다 보니 하고 싶은 말, 못다 한 말이 너무나도 많이졌네요.

그렇지만 이제는 노래 한 곡으로 그 말들을 대신하며 글을 마무리할까 해요.

 

 

 

 

🎵  산만한시선 - 성두빌라

 

산만한시선 - 성두빌라  [더 시즌즈-박보검의 칸타빌레] 250523

 

 

 올해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신인을 수상한, 제가 정말 정말 애정하는 포크 듀오, 산만한시선입니다. 산만하고 산 만한 시선으로 삶을 풀어낸 노래들이 매력적인 팀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포크 음악만이 지닌 매력은 진심이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포장이나 허세 없이 하고 싶은 말과 전하고 싶은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노래를 들을 때 저는 자주 마음을 빼앗깁니다.

 

 이를테면 ‘나의 외로움, 괴로움마저 당신의 얼굴을 닮았고 / 입으로 뱉지 못했던 말은 노래로, 노래로 하네’ 같은 노랫말이 그렇습니다. 듣고 있으면 머릿속으로 흐릿하게, 오래된 집 하나가 그려집니다. 앞서 이야기한 《미음을 마음처럼》의 ‘같이 사는 동안 보여주지 못한 나의 수선이 아른거립니다’ 같은 문장이 떠오릅니다. ‘진득하게 남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같은 문장도 함께요.

 

 

 

 

 어째서 말은 하면 할수록 불어나는 것일까요. 못다 한 말이라는 건 왜 끊임없이 생겨날까요. 편지를 쓸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저는 미련이 많은 사람이지만, ‘하나로 수렴되지 않고 통과해 뻗어나가는 빛과 멜로디’를 상상하며 다음 편지에서 쓸 말을 고르는 시간을 이만 가지려 합니다.

 

 따뜻한 말과 마음이 오가는 6월을 보내길 바라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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