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요일 #3. 무구함 회상
3월의 첫 번째 수요일입니다. 새 학기를 맞이하진 않더라도, 새로이 시작하는 기분만큼은 3월의 초입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미련을 가득 안고 살아가서일까요. 2월엔 한 시절이 끝나는 기분을, 3월엔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기분을 느껴요. 3월이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현실은 없는데 말이죠.
아마 그리움 때문일 겁니다. 순진하고 무구했던 시절. 어리석었고, 어수룩했고, 가진 건 없었으나 무엇이든 낭비하기 바빴던 때를 저는 자주 그리워합니다. 누군가의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어제 출근길에 몰아치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이런 그리움이 눈처럼 쌓였습니다.
쌓인 눈을 치우는 마음으로 고선경 시인의 시 한 편을 전하려 합니다. 언젠가 팟캐스트 <시시알콜>에서 고선경 시인의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요. “제가 시를 쓰게 만드는 건 그리움인 것 같아요.” “그리움에 취약해서…” 그래서인지 고선경의 시를 읽으면 공허한 마음에 딱 맞는 퍼즐 조각을 발견한 것처럼 즐겁고 반가워요. 시인과 시 속의 인물들이 꼭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아요.
“쓰러진 풍경을 사랑하는 게 우리의 재능이지.”(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중에서)
수정과 세리
나는 수정과 세리를 대학교에서 만났다 우리는 자주 우리였고 서로의 뿔을 아꼈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같은 무구함
이미 젖은 휴지로 물이 흥건한 테이블을 닦았다
테이블은 언제나 다리 하나가 모자랐다
우리는 그곳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셨고 책을 읽었고 글을 썼고 잡담을 나눴고 이내 늙어버렸다 뿔이 닳아버렸다 서로를 해독하느라
소음이 가득했던 날들
아무도 망가뜨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망가지던 스물
수정아
세리야
견딜 만한 불행 앞에서 우리는 참 기계적으로 슬펐어
주머니는 있는데 외투가 없었어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을 미리 깨뜨려두었어
수정은 의연했고
세리는 아연했다
얘들아 문예창작과는 더 슬픈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야 더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계속 지고도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수정과 세리는 다 알고도 번번이 져주었다 번번이
내가 이기고 싶어해서
그런데 이긴다는 게 뭔지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교정에 불던 봄바람
그건 정말 뭐였지?
이마를 긁적이며 오래 질문하였다
물기를 빨아들이고 무거워진 휴지를
벽에 던지면 철퍽 하고 우스운 소리가 났다
얘들아 우리는 우스운 소문이 되자
그런 건 해독하지 않아도 돼
수정은 고요하게 깨질 줄 알고
세리는 기계적인 웃음을 모른다
교정에 핀 개나리가 한낮의 별처럼 희미하게 흔들릴 때 우리는 참 시끄러웠다 닫힌 문을 모조리 열고 다녔다
이제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같은 예민함은 없지만
시간의 긴 뿔을 부러뜨려 잠긴 문을 여는 능숙함이 남았지 도둑처럼
문 안팎의 소음을 훔쳐다가 다시 뿔을 벼리는
우리는 학교 바깥에서 만났다 헌옷 수거함 같은 표정으로 만나 빈 주머니의 소음을 공모했다
모두가 져버려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 도모했다
깔깔 웃는 것으로 끝나는
시작되는
수정아
세리야
가느다란 가지에 주렁주렁 맺힌
한밤의 개나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
고선경, 「수정과 세리」
(문학동네 시인선 202 『샤워젤과 소다수』 중에서)
그건 정말 뭐였을까요. 교정에 불던 봄바람.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같은 무구함. 주머니는 있으나 외투가 없던 시절. 아무도 망가뜨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망가지던 스물.
화자가 수정과 세리의 이름을 부를 때 저는 그리움에 속절없이 당하고 맙니다. 만난 적 없는 사람, 가본 적 없는 공간, 겪어본 적 없는 시간까지도 그리워집니다.
다만 이 시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싶은 것은, 이러한 그리움이 그리움으로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다시 뿔을 벼리는 마음으로, 새 계절로 나아가고 싶어서입니다.
그리움은 과거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 혹은 미래와 공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시에서 문예창작과가 ‘계속 지고도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었듯, 삶은 계속 무언가가 그리워짐에도 다음을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그러니 그리워하고 또 유심히 들여다보아요. 수정아, 세리야. 지나간 이름들을 불러 현재와 미래로 데려와요. 깔깔 웃는 것으로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삶을 위해.
“내가 살아내고 겪어낸 시간과,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 안에 현재와 공명하는 것들이 충분히 있을 거라 믿어요.” (고선경 시인 인터뷰 중에서)
이어서 지난 한 달 동안 많이 들은 노래들을 소개합니다. 천용성의 앨범 <김일성이 죽던 해>에서 두 곡을 가져왔어요. <김일성이 죽던 해>, <대설주의보>를 온스테이지 영상과 함께 전합니다.
음악으로 기억을 일깨우다, 천용성
뜻밖이어서 더욱 따뜻한 싱어송라이터, 천용성을 소개합니다.
vibe.naver.com
불현듯,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이 생생히 떠오를 때가 있다. 뇌의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파편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추억으로 이어지는 신기한 현상. (뇌는 대단하다.) 여기서 또 재밌는 한 가지는 그 추억을 일깨우는 매개체가 내용과는 전혀 관계없을 때가 많다는 점이다. 기억을 소환하는 열쇠는 내 주머니 속이 아닌 주변 풍경 속에 떨어져 있다고나 할까!? 천용성은 그 열쇠를 잘 찾아내서, 추억의 문을 활짝 열 줄 아는 뮤지션이다. 그의 정규 앨범 [김일성이 죽던 해]를 관통하는 정서도 그렇다. 제목은 강렬하지만 앨범에 담긴 음악은 뜻밖에도 기억을 어루만지는 정갈한 언어와 멜로디로 가득 차있다. 뜻밖의 따뜻함이어서 보통의 따뜻함보다도 더 따뜻한 음악이다. - 김홍범(KBS 라디오PD / 온스테이지 기획위원)
초대받지 못한 생일에 나 혼자
즐거운 동무들의 모습들을 그리워한다
내 것이 아닌데
과장을 보태서 말하자면,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좋아서 숨이 멎는 줄 알았어요. 천용성의 노래는 그리움을 겹겹이 쌓아 만든 파도 같아요.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밀려오고 부서지는 기억이 있고 그것에 휩쓸리는 것이 두려워 우두커니 서 있는 제가 있어요.
어린 시절은 지나왔으나 돌아갈 순 없는 어떤 지점이죠. 내 희미한 기억 속엔 존재하지만 내 것은 아닌 시간입니다. 이 곡은 친구의 이야기를 쓴 것이라고 하는데요. 노래 속의 ‘나’와 김일성은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1994년을 ‘김일성이 죽던 해’라고 일컫을 때 한 사람의 이야기는 기억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냅니다. ‘초대받지 못한 생일 파티에서 즐거운 동무들의 모습을 그리워하는‘ 1994년의 내가 존재했던 것만 같아요. 겪어본 것만 같아요.
어쩌면 ‘나’는 지금도 그렇게 ‘내 것이 아닌 그리움’을 겪고 있는 지도 모르고요. 즐거운 동무들의 모습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때 이 이야기는 ‘나’의 현재와 공명합니다. 김일성이 죽던 해 샀던 인형은 어디에 있을까요. 지금도 있을까요. 지나간 시절을 부르듯 노래 부르는 무덤덤한 얼굴이 자주 생각났습니다.
다 자란 줄 알았지만 상처받기 싫어서
언젠가는 가야 할 길 돌아온
그곳에 아직 남아있던 당신의
시간에 져버린 주름에
옛날 생각나요
<대설주의보>를 들으면 저를 키워낸 사람과 사랑이 생각나요. 그럴 때면 다 자란 줄 알았던 나는 사실 웃자란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웃자라다라는 말은 ‘쓸데없이 보통 이상으로 많이 자라 연약하게 되다’라는 뜻인데요. 단어의 뜻을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슬픔이 밀려올 수 있다는 것을 저는 웃자라다는 말과 함께 배웠습니다.
이틀 전, 저는 양평 묘각사에서 아침을 맞았습니다. 대설주의보까진 아니었지만 밤사이엔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어요. 아침에 문을 열고 방에서 나왔을 때, 눈부시도록 새하얀 풍경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세상을 다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그 밤의 눈과 바람은 다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하루 동안 서울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지나간 시절을 딛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용기를 얻었습니다.
좋아하는 것들을 빌려 이야기하고 나니 익숙한 허기에 마음이 가벼워집니다.
아직 졸업하지 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오늘은 짜장면을 먹을까요.
춘장의 ‘춘’은 ‘봄 춘(春)’이래요.
당신의 찬란한 삼월을 바라며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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