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요일 #14. 봄편지
당신은 겨울을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겨울을 싫어하는 저는 추위에 무뎌지는 법이 없고, 움츠러드는 몸과 마음을 가진 채 살아가고 있어요. 계절과 시절이 내 안에 쌓일수록 삶에 무뎌지고 있는 걸까요.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면 답을 찾지 못한 질문만이 늘어가는 요즘입니다.
어제는 넷플릭스 드라마 <이 사랑 통역 되나요?>를 보다가 ‘세상에 다른 언어가 몇 개인 줄 아나?... 세상 모든 사람의 수만큼 있지. 사람들은 각자 다 자기 말을 해.’ 라는 대사를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쓰는 일을 계속할 용기를 얻었다고나 할까요. 저는 빌려다 쓰는 글이 많아서 하나의 언어를 가지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야기하듯 이어가 보겠습니다.
2월의 첫 번째 수요일입니다. 동시에 오늘은 입춘이기도 해요. 24절기 중에서도 입춘은 더욱 특별한 날이에요. 도무지 끝이 안 보이는 추운 겨울에 진저리가 날 즈음 갑자기 찾아오는 신비한 날이니까요. 입춘이라는 것은 어쩌면 ‘말 뿐인 봄’이라서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고, 알고도
심드렁하게 넘길 수 있는 그런 날. 이렇게 생각하니 괜히 더 마음이 가는 날입니다.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지지 않나요?
봄이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추운 겨울날 가운데 입춘이 찾아온다는 것.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만큼이나 기분 좋은 일은 아닐까요? 마음을 예열해두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결국 봄은 반드시 올 테니까요.

📖 자꾸만 꿈만 꾸자
작년 봄에 나온 따뜻한 시집 한 권을 소개합니다. 입춘을 맞아 봄편지라는 제목을 붙였거든요. 시집에 수록된 시 한 편과 봄에 어울리는 노래 한 곡을 담을 거예요.
최근 읽은 조온윤 시집, <자꾸만 꿈만 꾸자>는 살아갈 힘이 되는 언어가 가득 담긴 종합선물세트 같은 시집이었어요. 읽는 내내 ‘시 효용론’에 대해 마구마구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어떤 시로 온기를 전할까 고민하다 시인이 한 인터뷰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시편으로 꼽은 한 편을 가져왔어요.
찬바람이 책장을 넘기네
열린 창으로 네가 바깥을 보고 있었어
나보다 몇 배는 키가 커서 난간에 팔을 걸친 채로
무의미하게 영혼을 한 모금씩 소모하듯
날숨을 허공으로 흘려보내고 있었어
네가 무얼 보는지 궁금해서 너의 다리 사이로
창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어
맞은편 아파트의 불 꺼진 복도들만 보였지
읽을 수 없게끔 검정으로 죽죽 그어버린 줄글처럼
실은 네 눈이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어
그때 너는 네 몸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워 보였어
너덜거리는 너의 영혼이 허공으로 날아갈까봐
나는 목놓아 울었어
이봐, 나를 보라고
치렁치렁한 외투와 모자를 벗어 조그만 못에 걸어놓듯
필요하다면 이 작은 내게로 시선을 걸쳐두라고
슬픔의 냄새가 밴 품이 썩 편안하지만은 않지만
아무렴 어때?
네가 몸을 돌려 이윽고 나를 내려다보았을 때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눈높이까지 나를 들어올렸을 때
내가 너의 누름돌이라는 걸 알았어
너는 홀연 날아가지 않기 위해 나를 데려왔구나
매일 밥을 먹으며 튼튼하고 무거운 몸을 가지자
그리고 언젠가 눈높이만큼 자란 내가 창가에 다가가
네 어깨를 지그시 누른다면
나눠줄 수 있겠니?
네가 읽는 책에 어떤 절망이 쓰여 있는지
네가 있는 세상에 어떤 절망이 휘날리고 있는지
우리는 끝나지 않는 장면을 펼쳐두자
귀퉁이에 가만히 손가락을 얹고
같은 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자
-
조온윤, 「생각하는 문진」 (『자꾸만 꿈만 꾸자』)
화자가 바라보는 ‘너’는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눈을 가졌습니다. 슬픔의 무게에 대해 생각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크나큰 슬픔을 가진 이는 무거움을 떠안은 채 주저앉고 가라앉을 것만 같은데, ‘너’는 그 반대입니다. 지나치게 가벼워 영혼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릴 것만 같죠. 이토록 가벼운 슬픔은 잘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짐작하기도 어려운 슬픔의 누름돌이 되어주는 ‘나’의 말이 어쩜 이렇게 따뜻할 수가 있을까요. 찬바람이 책장을 넘길 때 끝나지 않는 장면을 펼쳐두기 위해 귀퉁이를 지그시 누르는 존재가 있다니요.
인터뷰에서 시인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세상에 왜 다들 자꾸만 반려의 존재를 짊어지는지’ 어렸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해요. ‘돌덩이인 줄 알았던 존재가 누름돌이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 깨달았다고 하면서요.
저는 아직 삶을 붙들게 해주는 문진 같은 존재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요. 그렇지만 이 시가 펼쳐놓은, 끝나지 않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 춘곤증
이어서 함께 듣고 싶은 노래는, 남해에 사는 싱어송라이터 안지원의 EP <아마추어의 집>에 수록된 ‘춘곤증’이라는 곡입니다. 앨범엔 5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든 곡을 정말 많이 들었어요. 앨범의 프로듀서 단편선은 ‘햇살 좋은 날 친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는 듯한 앨범’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정말 그래요. 시골에서 수집한 느슨하면서도 진솔한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어요.
또한, ‘아마추어’의 어원이 ‘사랑하는 사람' '헌신적인 숭배자'라는 뜻의 라틴어 'amator’라는 것을 이 앨범 덕분에 알게 되었어요. 이 앨범이 지향하는 ‘아마추어리즘’은 미숙함과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느슨하지만 선명하고 생생하게 전해지는 삶. 삶을 사랑하는 사람의 음악엔 커다란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본격적인 봄이 오면 부지런히 음악을 만들고 노래하는 것으로 제가 가진 언어를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업로드한 커버 곡 영상 하나를 덧붙일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년 2월 4일 수요일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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