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불굴의 활기
2025. 11. 5.

 

🌹 첫 번째 수요일 #11. 불굴의 활기

 

 안녕하세요. 정수입니다. 벌써 11월의 첫 번째 수요일이라니. 달에 한 번 쓰는 이 편지를 쓸 날이 돌아왔다니. 심지어 열한 번째라니. 오늘은 뭔가 감회가 새롭고 기분이 들뜨네요. 다시 읽은 지난 편지엔 기분과 기운이 가라앉아 축 처진 사람의 글이 들어있었는데 다행이에요.

 

 좋은 것을 많이 보고, 좋은 사람을 가까이 둔 덕분이겠죠.

 이 에너지를 손에 꼭 쥐고서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요.

 

 

🎥  영화 <세계의 주인>

 말이 필요 없는 영화라는 말이 필요했어요.

 

 

 

 영화 상영이 끝나고 씨네토크가 시작되었을 때 저는 마음속에서 차오르는 감탄의 말을 참느라 힘들었어요. 우선 들었던 생각은, 정말 잘 만든 영화다. 감상을 표현하는 것이 서툰 제가 이 말을 할 땐 보통 ‘정말 잘 만든 영화인데 내 취향은 아니라… 그래도 재밌었어!’의 의미를 담은 것인데요. 이번엔 다릅니다. 

 

 영화를 보고 ‘창작할 용기’를 얻었거든요. 저는 영화 만드는 사람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로 포화 상태인 이 세상에 무언가 내 것을 만들어 내놓는다면 이런 것이라면 좋겠다, 하는 마음입니다. 영화는 주인공 주인을 둘러싼 세계의 모든 것을 뭐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섬세하게 그려냈어요. 규정하거나 강요하는 방식이 쉬운 길이라는 걸 알지만 그런 것으론 세계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다는 듯이 말이죠. 영화를 만드는 데에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얼마나 많은 헤아림과 깊은 고민이 그 시간에 담겨있을지 가늠하기란 어렵습니다. 

 

 사랑스러운 장면이 너무나 많아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어지는 영화였어요. 아, 영어 제목은 ‘The World of Love’랍니다.

 

 감독님은 씨네토크를 마무리하며 이제 영화에 대해 함부로 마음껏 이야기 나누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구구절절한 말들은 이곳에선 아껴둘게요.

 

 

 

🎼 정수 - 10월 무제

 아껴둔 말들을 모아 노래를 만들었어요.

 입으로 뱉지 못한 말을 노래로 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거든요.

 

 

 

 

 기타를 배우고 처음으로 만들어본 노래인지라 많이 미숙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틀이 지난 뒤 머릿속에 떠다니는 단어들과 좋아하는 시의 문장을 엮어 만들었어요.

 처음엔 이렇게 꺼내놓을 생각은 없었기에 퇴근 후 빨래를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녹음을 했는데요. 세탁기 소리가 무슨 기차 소리처럼 들리는 거예요. 그 뜻밖의 발견이 무척 기뻐서 저의 유튜브 노래 채널에 올려두었습니다.

 

 

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불굴의 활기가 솟아오른 웃음과 꺾을 수 없는 생기가

어쩌면 난 널 만나고 싶었는지도 몰라

웃자란 아이가 못다 한 말들과 까맣게 그을린 매일 밤

 

무의미한 순간이라 해도 생생한 웃음을 지어주겠니

아주 은밀한 공간이라 해도 내게만 슬픔을 빌려주겠니

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웃자란 아이가 못다 한 말들과 까맣게 그을린 매일 밤

 

 

 주인이에게 불굴의 활기와 꺾을 수 없는 생기 같은 것이 있었으면 했다. 감독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영화의 사랑스러운 장면들을 떠올리며 만들었어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실은 한 해 동안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 세상엔 너무나 많은 노래와 너무나 많은 목소리가 이미 존재하잖아요. 내가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좀처럼 명쾌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죠. 닮고 싶은 음악가는 늘어만 가고, 제가 만들고 싶은 노래는 그들의 노래처럼 ‘잘 만든’ 노래인데… 단지 ‘좋은 노래’를 만들겠다고 아무 말이나 가져다 포장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만든 노래를 좋아해 주는 친구들이 있기에 기쁩니다. 노래를 들려준 다음날, 한 친구가 보내준 가수 이영훈 님이 쓰신 글이 기억에 남아 가져왔어요. 

 

이영훈님 인스타그램 글의 일부

 

 음악은 만드는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음악 가까이에서 살면서 마침 마주치곤 하는 인상적인 순간들을 음악으로써 기록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고 하게 될 일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  김이듬 <후배에게>

 사는 것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음악을 좋아해?

걷는 걸 좋아해?

맛있는 걸 좋아해?

 

네가 사는 것도 좋아하면 좋겠다

 

너를 기다리는 카페에서 옆자리 사람들의 대화를 듣는다

아이들 점수, 아이들 담임, 아이들 친구, 아이들 운동장, 아이들 급식…

학부모 회의를 마치고 온 두 사람은 세 시간 넘게 아이들 이야기에 몰입한다 한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멜빵바지를 입었어 둘 다 4학년 2반이며 한 아이는 수학을 잘하는 여자아이, 한 아이는 강아지를 좋아하는 키가 작은 남자아이인 걸 나도 알게 되었어

 

사랑하는 대상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가장 많이 말하는 거라면

나는 너를 다섯 번 생각했다

이리하여 쓴다

 

사는 게 뭘까?

연말 퇴근길에 너는 말했지

다른 부서 과장의 부친상에 조의금을 부쳤고 야근을 했고 배고파 죽겠다고

회사 가는 게 괴롭다고 말했어

사는 게 뭔지 달아나고 싶다고

안경 벗으면 딴사람 같은

 

너는 김연아와 에디 레드메인과 인천 사는 친구를 좋아하지 얇은 티셔츠에 청바지 입길 좋아하고 초코우유와 망원 한강공원을 좋아하지 빨래하고 누워서 웹툰 보길 좋아하지

 

일과중에 나는 너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제일 좋아

널 만날 약속 없었다면 온종일 끔찍했겠지

 

나도 너처럼 습관적으로 한숨 쉬지만

네가 얼굴 뾰루지랑 새치를 걱정하면서도

솟아오르는 웃음을 터뜨리면 좋겠어

 

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의미 없어도 생생하지

사는 걸 꽤 좋아했으면 좋겠어

 

 

김이듬, 「후배에게」 (『투명한 것과 없는 것』)


 

 오래 잊히지 않는 시는 여럿 있지만 이 시는 저에게 특별한 의미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영화에 대한 감상을 노래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 불현듯 이 시가 생각났어요.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이 시의 마지막 연과 닮아 있다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쩌면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

의미 없어도 생생하지

사는 걸 꽤 좋아했으면 좋겠어

 

 어쩌면 정말 삶에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연말이 오고 겨울이 되면 이유 없이 우울해지는 날도 있겠지만, 우리 의미 없어도 생생한 웃음을 지으며 사는 걸 꽤 좋아해 보자구요.

 

 

불굴의 활기를 담아

2025년 11월 6일 수요일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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