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오늘 치 안간힘
2025. 10. 1.

 

💊 첫 번째 수요일 #10. 오늘 치 안간힘

 

 어느덧 시월의 첫 번째 수요일입니다.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인 저는 이 사실을 조금 뒤늦게 알아차리고 말았어요. 의지가 부족해 고작 핑계에 지나지 않는 말을 늘어놓는 것인데요. 글을 쓸 준비가 안 되어있다고 느끼는 이런 날엔 목표한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어집니다. 자신과의 약속 하나 지키며 사는 것이 왜 이리도 어려울까요.

 

 그렇지만 힘을 내보려 합니다. 준비가 덜 된 상태이기에 어쩌면 더 솔직한 모습으로 써 내려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열흘 전 즈음부터 저는 후두염과 싸우며 빼곡하게 잡아놓은 일정들을 소화해야 했습니다. 바쁨과 아픔 모두 자처한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즐거운 날들을 보냈지만, 지금 저는 조금 지친 것 같아요. 울다 지친 사람보다 웃다 지친 사람이 더 위험하다고 누가 그랬는데… 매월 첫째 주 수요일에 글을 쓰기로 한 과거의 제가 무척 원망스럽습니다.

 

 저는 나약한 사람이거든요. 약을 챙겨 먹어야만 하는 아픔의 시기가 찾아오면 무기력감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 그래서 생생한 악몽을 자주 꾸는 사람. 왜 몸이 아플 땐 악몽까지 찾아오는지. 아플 땐 잠이 보약이라면 부작용 같은 것도 있는 건지.

 

 원래는 시월의 편지를 가을 여행기로 채우고 싶었지만, 악몽을 달래고 지친 하루를 위로하기 위해 오늘은 서윤후 시인의 시 한 편을 빌려오고 싶어요.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사프란

 

 

 너는 육교를 건너고 있어. 아주 조금의 지체가 필요했으니까. 엄마는 늘 차조심하라고 육교로 건너라고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너는 높은 곳에만 올라서면 천사의 표적이 되지. 단란한 놀이공원의 사격 게임처럼 추락하면 가질 수도 있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엄마는 그런 건 몰라. 너무 완만하고 푹신하니까.

 

 너는 구청에서 심은 사프란의 꽃말을 보고 있어. 지나간 행복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팟캐스트 흘러나오고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이야기는 너무 많아, 작은 실화가 어떻게 세상을 묶는지. 또 리본을 풀면 왜 다시 같아질 수 없는지. 아꼈던 것들이 어째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지. 홀로 매듭을 외우다가

 

 선물 같은 하루를 드려요 일일권장량 가득 채워진 약국 비타민 광고 지나며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선물을 스스로 가져본 적 있던 너는 바게트 사이로 포개어져 축축한 루콜라처럼 아직까지 초록인데, 오늘 치 안간힘인데, 건물 사이 테이블 사이 사람 사이를 지나 시들어가고 끝없이 걸어도 벗어날 수 없는 국어사전 속 하나의 단어가 한번 불리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셈하고

 

 서두르지 말라는 말이 용서처럼 들릴 때, 너는 처음 본 벤치에 앉아. 의자에게 이름을 주려고 했던 낙서를 깔고 앉아서는 집에 가는 상상을 하지. 집은 언제나 항상 멀어. 거리의 띄어쓰기마다 장미가 무더기로 피어 있고, 그건 꼭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한꺼번에 불러본 목록 같지. 맑은 얼굴로 탕진하려는 빗줄기 마침 쏟아지고 너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정류장에 모여 있는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의 우산을 나눠 쓰고 있어.

 

 

-

문학과지성 시인선 615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 서윤후 시인의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인의 말이 적혀있어요. 그래서인지 제가 느끼기에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나쁜 꿈’ 같기도 하고 눈부신 후광처럼 남겨진 과거 같기도 해요.

 

 돌아보지 않으려고

 나는 이 악몽을 받아 적고 있다.

 

 

 오늘 제가 받아 적고 싶은 악몽은 너무나도 애정하는 사프란이라는 시입니다. 지나간 행복. 그리고, 오늘 치 안간힘. 안간힘이라는 단어의 뜻을 아시나요? (저는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찾아보고 알게 되었어요)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서 몹시 애쓰는 힘’, ‘고통이나 울화 따위를 참으려고 숨 쉬는 것도 참으면서 애쓰는 힘’ … 무언가를 이뤄내기 위해서 혹은 참아내기 위해서 애쓰는 힘이라니요. 숨 쉬는 것도 참으면서 애쓰는 힘이라니요. 이 말 앞에서 저의 괴로움은 한없이 작아지는군요.

 

 그렇지만 괴로움이란 게 등을 맞대고 키를 비교하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마주 보아야 하는 것에 가깝죠. 집으로 돌아오는 ‘언제나 항상 먼 길’에서 저의 오늘 치 안간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어요. 괴로움이 아닌 오늘의 성취와 인내를요. 또 ‘거리의 띄어쓰기마다’ ‘건물 사이 테이블 사이 사람들 사이’마다, 저마다 품고 있을 ‘오늘 치 안간힘’에 대해 생각했어요. 초록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루콜라처럼, 축축한 등을 데리고 그렇게 집으로 왔어요.

 

 

 그래도 집에 와서 그런지 지금은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시 속의 ‘나’처럼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스스로 베푸는 용서처럼 하며 앉아있어요. 오늘 치 안간힘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곱씹으니 이제는 같은 말도 조금 다르게 다가오네요. 오늘을 오늘 치 안간힘으로 살아냈다면, 내일은 또 다른 힘이 내게 깃들지 않을까. 안간힘은 탕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니까.

 

 

 

[Full Album] 산만한시선 (Sanmanhan) - 산만한시선 2 (Sanmanhan 2)

 

 

💿  산만한시선 - 산만한시선2

 

 이어서, 산만한시선의 새 정규 앨범을 추천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이들 또한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죠. 지난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신인을 수상한 이들은 무척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고 최근엔 무려 열여섯 트랙을 담은 앨범을 발매했습니다.

 

 아래 옮긴 글은 앨범 소개의 일부입니다.

 


관찰에서 시작되어 저희의 작은방에서 끝이 나는 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런 말들을 나누었습니다.

 

사실적인 장면을 그대로 옮겨오는 일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는 것과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노래가 될 수 없다는 것. 동시에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아파했던 사건만으로도 노래는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면 우리는 어떤 노래를 하지?

 

어제 우리가 본 것들과 보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울고 웃었던 일들 – 우리에게 이야기가 없다면 이야기를 모으고, 경험이 없을 때에는 경험들을 빌리면서

 

행여 내 것이 아니더라도 흩어진 시선들을 전부 모아 언젠가 우리가 살았던 날들을 설명할 수 있도록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

 

다큐멘터리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잘 짜여진 소설이 될 수도 없는 저희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노래해 보기로 했습니다.

 

[산만한시선 2]는 생활의 관찰과 개인적인 사건들에 대한 변명과 픽션들이 뒤섞인 전혀 사실적이지도, 솔직하지도 않은 앨범입니다.

 

그러나 저희가 노래하고자 하는 영역은 늘 생활에 있습니다. 듣는 음악을 넘어서, 볼 수 있는 음악을 부르고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라며.

 

감사합니다.


 

 어제의 저는 어제의 ‘오늘 치 안간힘’을 이들의 게릴라 공연을 보러 가는 데에 사용했는데요. 저녁 식사를 거르고 퇴근하자마자 공연장으로 달려갔고, 앉을 자리가 없어 두 시간 반 동안 서서 이들의 말과 노래를 경청했어요.

 

 노래를 하는 이들도 듣는 이들도 모두 전력을 다하고 있는 그 시간과 공간이 어찌나 좋던지요. 돌이켜 보니 어제도 저는 안간힘이라는 게 탕진이 아닌 충만함을 남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운 셈이네요.

 

 올가을엔 시간을 내어 산만한시선의 음악을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날이 추워질 무렵에 돌아오겠습니다. 

 

 

 

 

당신의 생활에 힘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5년 10월 1일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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