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요일 #13. 밤에서 아침으로 가는 통신
2026년의 첫 번째 수요일, 잘 보내셨나요. 해가 바뀌고, 나이가 들면서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들이 있잖아요. 올해는 스쳐가는 것들을 잠깐이라도 더 쥐고 있고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쓰게 됩니다. 서른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서른의 서론 같은 글을 이어가 보겠습니다.
이것저것 쓰게 되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겠지요. 꼭 글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쓰는 일은 마음을 비워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가진 거라곤 몇 없는데도 비워내야 할 게 많은 인간이랍니다.
며칠 전 방에 혼자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방에 참 쓸모없는 것들이 많구나.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이라는 어느 책의 제목을 툭 떼어다 붙여주고 싶은 곳이 바로 저의 방입니다.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에요. 좁은 공간을 더 좁게 느껴지게 만드는 책과 음반과 악기들이 그 주인공이니까요.
무용해서 더 가치 있는, 역설적인 물건들이 20대의 마지막 날엔 괜히 미웠습니다. 나는 나를 어떻게든 채워보려 애썼구나. 내가 그렇게 텅 빈 사람이었나. 스스로를 조소하며 멍하니 책장을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15권 정도는 읽지도 않은 책이었으니 한때 나를 온전히 살게 해준 고마운 책들은 보이지도 않더군요.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모순적인 나를 발견하는 것도 사는 재미인걸요. 그저 의연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끝난 날이었습니다.
🎥 여행과 나날
12월에 본 영화 <여행과 나날>은 정말 좋았습니다.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가 궁금하기도 했고, 심은경 배우를 스크린에서 보고 싶기도 해서 거의 개봉하자마자 보았던 영화였어요.
영화는 슬럼프가 온 각본가의 이야기였는데, 카피라이터 일에 지쳐있던 터라 그런지 큰 위로가 되었어요. 여백이 많은 영화가 지닌 호흡이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요. 말이라는 틀에 갇혀 있던, 말에서 멀리 떨어져 머무르고 싶어 하던 주인공이 말로는 표현이 잘 안되는 순간들을 맞이할 때마다 아주 고요한 희열을 경험했어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고도 해요.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는 보통의 여행 영화와는 달리 장면이 바뀔 때마다 놀라움이 있었으면 했다. 여행의 감각을 주고 싶었다. 바람을 찍고 싶었다.
12월 초 느꼈던 그 ‘여행의 감각’에 더 가까워지고자 결국 12월 마지막 주에 저는 홀로, 즉흥적으로, 춘천으로 떠났습니다.
🎼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12월 30일에서 31일로 향하는 밤, 춘천에서 노래를 하나 썼어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들이 모두 녹아있는 노래를요. 그래서 조금 어두운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데, 저는 이 곡을 희망의 노래라고 생각하고 만들었어요.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허수경 시, <불우한 악기> 중에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는 작은 새 한 마리, 아득히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린 그 새가 희망이라면, 먼저 가 있겠다 말하는 것이었다면. 마음에도 없는 소리들로 가득 찬 나도, 두 손을 비우지 못해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있는 나도 먼 길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만든 노래랍니다.
(가사)
12월 무제
한 글자도 쓰지 못했네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먼 길을 갈 수 있을까
아직은 그 답을 듣지 못했네
노래는 물처럼 흐르네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시간뿐이려나
아직은 두 손을 비우지 못했네
뚫어져라 보던 지도에 가리워져 있던 길
나는 이제 발을 내딛으려 하네
희망의 날개를 단 작은 새 한 마리가 사라져 가네
먼 곳으로 먼저 가 있겠다 하네
한 글자도 쓰지 못했네
아직은 두 손을 비우지 못했네
앞에서 이야기한 영화의 엔딩엔 새하얀 눈길이 나와요. 감독은 꿈 같은 설국을 빠져나오며 진창을 밟는 주인공을 찍고 싶었는데, 촬영 전날 눈이 많이 왔대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그 영화의 엔딩 씬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여행이 끝나도, 해가 바뀌어도, 많은 것이 변해도 우리의 아름다운 장면들은 계속될 거예요.
2026년 1월 7일 수요일
정수 드림
P.S. 오늘 편지의 제목은 이 노래에서 가져왔어요. 따뜻한 1월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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