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요일 #12. 주머니에 손을 넣고
안녕하세요.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몹시 추운 12월의 첫 번째 수요일에 인사드립니다.
매달 첫 번째 수요일에 수취인 불명의 편지 형식을 빌려 쓰기 시작한 글이 어느덧 열두 번째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알아주는 이가 거의 없는 일이라면 더욱 그렇고요. 스스로에게 칭찬을 건네며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2025년의 마지막 편지를 보내요.
겨울에서 겨울
서울에 본격적인 추위가 들이닥친 오늘에서야 겨울을 실감합니다. 가을에 남은 미련이나 겨울을 싫어하는 이유 같은 건 많지만 오늘만은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겨울에 시작한 일이 겨울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좋아서요.
좁은 집 책장에 공간이 부족해진 탓에 사무실 책상에 쌓아둔 책들이 있습니다. 한여진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가 그중 하나입니다. 첫 번째 편지를 적을 때 곁에 두었던 시집이 겨울에서 겨울까지 저의 책상 한편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 이런 사소하고 새삼스러운 발견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저의 연말입니다.
언제부턴가 저는 연말이 되면 느닷없이 찾아오던 부정적인 감정들에 무뎌진 것 같아요. 대단한 일 하나 이뤄내지 못하고 20대가 끝나면 마음이 텅 빈 것처럼 헛헛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모든 일에 초연해진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법 어른이 되었다는 착각과 오만 속에 빠져 사는 것일지도요.
정말 모르겠어요. 갈수록 모르겠다고 말하는 빈도가 늘어나는데, 저만 그런 걸까요? 단정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긴 한걸요.
미래의 시인에게
어찌 됐든 간에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좋은 것이 연말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시 한 편을 가져왔어요. 어떤 시는 다짐처럼 읽힙니다. 미래의 나에게 부치고 싶은 문장들이 들어있기 때문에요.
김복희 시집 『보조 영혼』의 마지막에 수록된 시이자 ‘미래의 시인에게’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으니 오늘 같은 날 읽기에 안성맞춤이랍니다. (한여진 시인의 ‘미래에게’와 함께 시작한 1월의 첫 번째 수요일이 12월의 ‘미래의 시인에게’로 이어지다니.. 감격..)

너
네가 꾸릴 수 있는 가장 깊은 주머니,
네 손끝을 언제까지나 안타깝게 만들
떨어뜨려라. 떨어뜨려.
네가 놓은 손과 놓친 손과 꽉 잡은 손 모두.
네 가장 훌륭한 주머니 가득.
오래전 문 닫은,
아이들이 전부 사라진 학교처럼
폭염 속 그늘에서 잠든 노인의
벌린 입처럼.
그리고 주머니는 네가 채운 손들을 살랑살랑
흔들지. 서로 꼬집지 않도록 서로 엉겨 붙지 않도록.
이쯤 되면 주머니보다 자루가 더 어울리려나
싶겠지만. 주머니는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루와 다르지.
손들이 나타내는 말을 한 번 살펴봐.
주머니만 보고 손들이 하는 말을 고민해봐.
큰 나무뿌리의 들뜸을
악의로 읽지 않기.
갑자기 오는 비를
징조나 선언으로 여기지 않기.
비가 흐르는 도로를
물개들이 헤엄치는 해안이라고 말하지 않기.
모두가
모든 소리를 듣는다는 생각에서
빠져나오기.
모두라는
개념에서 빠져나오기.
밤이 온다
잠이 온다
비가 온다
는 표현이
표현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기.
네가 주머니에 새로운 손을 집어넣을 때마다
달라지는 말들.
주머니를 달랠 때마다 조금씩 바뀌는.
-
김복희, 「미래의 시인에게」 (『보조 영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지금의 내가 꾸릴 수 있는 가장 깊은 주머니를 상상해보아요. 그 안에 내가 놓친 손과 놓은 손, 꽉 잡은 손을 넣고 겨울의 거리를 걸어요. 아무도 모르는 깊은 주머니를 가진 탓에 손끝은 여전히 방황하고 있지만, 무언가를 다짐하는 사람처럼 주먹을 꼭 쥐어 보아요.
지나간 시간도 스쳐간 인연도, 사라진 마음도 모조리 소멸해버린 건 아닐 거예요. 깊은 주머니 안에 담겨 있는 것이 있을 거예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희망이 있을 거예요.
그러니 이제 새로운 다짐의 말을 품고 미래로 가요. 미래의 시인이 되어,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섬세한 말들을 꺼내 놓기로 해요. 새로운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달라지는 말들을 꺼낼 때, 미래는 조금씩 바뀔 거예요.
어른이 된다는 건
오늘은 긴 이야기를 쓰기보다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에 두고 싶은 시와 노래를 소개하는 것에 집중하려 해요. 앞에서 스스로를 모든 일에 초연해진 사람 같다 했었죠. 그래서일까요. 시와 노래 하나씩을 고르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12월의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제가 고른 노래는 (어제 첫 앨범을 발표한) 최제니의 ‘어른이 된다는 건’입니다.
사랑은 뭔가 쉬웠던 거 같은데
내가 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나
나는 언제쯤 누군가를 아낄 수 있는가
그게 내 네 밤의 고민이었네
나이가 들면 다 철든다 했었나
아니 난 그저 똑같은 것에 웃는데
헌데 그런 내가 왜 난 또 싫진 않은가
싱그러운 어린 마음이었네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거야
엄마의 한 말을 난 꼭 믿었나
이 깊은 밤의 울음 속은 무엇인가
아무나 내게 답을 해주오
가는 모든 길이 평탄하다 했나
터무니없는 우스갯소리
한 사람의 마음에 진심이 닿는다면
그러면 저리 기뻐 뒹굴겠네
이 어른조차도 사라질 거야
언젠간 작별할 우리들의 이야기
사무치는 이 외로움을
외면할 방법을 내게 꼭 제시해 주오
이별 같은 게 익숙해질 그날
내가 원한 걸 하지 않은 그날
울음조차 없어져 미소 짓는 날
그날이 나의 어른이겠네
나는 그렇게도 걸어간다
사람들이 다 날 지나갔기에
나의 노래와 사랑이 다 힘이어라
내 삶을 살아간다
내 삶을 살아간다
어른보다 서른
최제니의 앨범을 들으면서 저는 ‘나와 닮은 누군가가 소중히 쓴 일기장을 펼쳐보는 기분’을 느꼈어요. 모든 트랙이 좋았는데, 아무래도 지금 제게 가장 와닿는 노랫말은 ‘어른이 된다는 건’의 가사네요.
어렸을 땐 스무 살이 되면 어른이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어른보다 서른이 먼저 되는 듯한 이 기분은 뭘까요. 어른이 된다는 건 뭘까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수많은 말들이 있지만 이 노래만큼 적확한 표현은 찾기 힘들 것 같네요.
오늘도 어른이 못된 저의 미성숙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26년에 만나요.
2025년 12월 3일 수요일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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