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요일 #8. 사랑과 멸종
안녕하세요. 8월의 첫 번째 수요일입니다. 무더운 여름,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저는 지난 일요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잔나비 콘서트에 다녀왔어요. 거의 네 시간 동안 사람으로 가득 찬 거대한 공간에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랑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죠.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잔나비의 무명 시절 버스킹 무대를 재현한 30분이었는데요. 알지 못했던 어느 시절을 그려보는 일이 즐거웠고, 10년이 넘도록 청춘을 노래할 수 있다는 게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앵콜 전 마지막 곡으로 ‘꿈과 책과 힘과 벽’을 부를 땐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두 사람은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또 했어요. 꿈을 꾸라는 말도 했어요.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는 쉽게 잊히지 않는 것 같네요. 요즘 같은 여름밤이라면 더욱 그래요. 희미해져가는 꿈과 사랑을 되살리기엔 아무래도 여름밤만 한 것이 없죠. 오늘 밤엔 어떤 향에 취한 사람처럼, 흐릿한 풍경 하나를 그려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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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서는 멸종된 과일 향이 난다
(고선경, <샤워젤과 소다수> 중에서)
이것은 그리움에 취약한 인간인 제가 그리움을 생각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문장입니다. 공교롭게도 저는 지금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라는 이름의 시집을 읽고 있고, 이찬혁의 ‘멸종위기사랑’이라는 노래에 푹 빠져 있어요. 그래서 오늘은 꿈과 사랑의 멸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멸종된 과일 향. 지난여름 동안 저는 이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고선경 시인의 시집을 읽고 너무 좋아서, 시인이 출연해 시 이야기를 나누는 팟캐스트를 들었거든요.
거기에 나온 사람들은 단종된 과실주를 마시면서 시 이야기를 했어요. 멸종된 과일 향을 이해해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시를 낭독하면 들려오는 건 잔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감탄사를 내뱉었죠. 사람들은 시에 감동한 걸까 아니면 술에 감동한 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그 팟캐스트는 그래서 더 좋았습니다. 그 뒤로도 많은 이야기가 오갔는데, 그리운 마음이 시를 쓰게 한다는 시인의 말이 기억나네요.
지난여름 읽고 들은 것을 다시 떠올린 여름밤이 있어요. 고온다습한 날씨, 길 곳곳에 초록의 기운이 번지는 밤. 여름밤의 냄새는 기억을 깨우고, 기억은 그리움을 동반하죠. 후각은 그렇게 속절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조금 이상했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능소화 앞에서 어떤 향에 매혹당한 사람처럼 한참을 서있었는데, 능소화는 사실 향을 느끼기엔 어려운 꽃이거든요. 아마 그리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혹시 멸종된 과일 향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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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의 꽃말은 그리움, 기다림이래. 저는 그리움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말했어요. 오랫동안 오늘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그날은 저를 살린 음악을 만나러 간 날이었고, 친구들에게 시집을 선물한 날이었고, 석양이 아닌 노을을 바라본 날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끝내주는 하루. 이상하게 능소화를 보면 그날 생각이 나요.
다음을 기약하던 그날 새벽엔 그리움과 기다림에 대해 다시 생각했어요. 어쩌면 둘은 연결되어 있는 지도 모르겠다고. 단순히 그리움은 과거, 기다림은 미래를 향해있는 마음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막연한 기다림도 즐거워졌어요. 길에서 우연히 이름을 아는 꽃 하나 발견하는 일처럼.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공룡은 운석 충돌로 사랑했다고 추정된다
현재 사랑이 임박한 생물은 5백 종이 넘는다
우리 모두 사랑 위기종을 보호합시다
어젯밤 우리가 멸종의 말을 속삭이는 장면
아주 조심스럽게
멸종해, 나의 멸종을 받아줘
우리가 딛고 있는 행성, 멸종의 보금자리에서
공룡들은 사랑했다 번식했다 그리하여 멸종했다
어린아이들은 사랑한 공룡들의 이름을 외우고
분류하고 그려내고 상상하고 그리워하고 아이들은 멸종하고
사랑하다
멸종하다
운석의 일방적인 사랑은 지구에 새로운 멸종을 가져온다
사랑하니까 다가가고 폭발하니까 사랑하고 멸종하니까 사랑하고 멸종에 빠져버리고 사랑 때문에 천천히 숨이 끊어지는 거야
어젯밤 우리는 슬픈 동물이었고 울었고 껴안았고 두드렸고
우리가 인간이었으면 했고 인간이 아니었으면 했고
짐승의 멸종에는 사랑이 필요했고
다가오는 운석에 무슨 이름을 붙일지 고민하면서
그게 아픈 감정의 이름과는 똑같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나누면서
사랑이 없어서 멸종하는 거야 멸종이 없어서 사랑하는 거야 멸종하기에 번식하고 진화하고 사랑하기에 언어를 얻고 잃어버리고
별 하나의 폭발이 밤하늘에 박제된다
멸종해, 너를 멸종해
우리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운석은 다가오고 우리들은 어떤 방식으로 완벽하게 침묵할 것인지 어젯밤 우리가 나누던 말들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우리의 언어는 멸종에 관한 것이었는지 사랑에 관한 것이었는지
폭발할 때 가장 빛나는 것
말 단어 대화 목소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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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608 유선혜 시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그날 제가 선물 받은 시집은 유선혜 시인의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입니다. 표제작인 이 시가 저는 참 좋아요. 제목처럼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는’ 재미가 있고, 읽고 나면 (책 뒤표지의 문장처럼) ‘어쩔 수 없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고르는 마음을 존중하고 싶어’지거든요.
꿈이나 사랑 같은 것의 멸종을 상상해 본 적 있나요. 내가 꿈꾸던 것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죽었다며 냉소 섞인 말을 해본 적 있나요. 이 시는 사랑하는 것이 멸종해버리는 비극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는 것만 같아요. 어쩌면 사랑하는 것이 멸종하는 세계가 아니라, 멸종하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요. 멸종해. 너를 멸종해. 나의 멸종을 받아줘. 폭발하듯이 발화할 때 가장 빛나는 사랑이 있어요.
또 어떻게 보면 멸종은 인간의 미래잖아요. 유선혜 시인은 두 단어를 바꿔 놓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고 해요. “모든 것이 소중하지만 동시에 허무한 느낌. 사랑과 멸종 모두 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사랑과 멸종이라는 두 단어는 삶을 견디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시인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면서 저는 ‘사랑과 멸종’의 상관관계가 꼭 ‘그리움과 기다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 위기종을 보호합시다”
이렇게 외치는 화자처럼 노래하는 이찬혁의 ‘멸종위기사랑’과 함께, 이제 8월의 글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사랑의 멸종을 말하는 노래.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희망찬 노래. 어쩌면 멸종위기사랑은 이 시대를 관통하는 곡이 아닐까요. 아무도 안 믿었던 사랑의 종말론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을 꿰뚫는 그런 노래 말이에요.
시처럼 노래처럼, 멸종에는 사랑이 필요해요. 우리 함께 몇 번이고 여름을 견뎌요.
발화하는 사랑을 담아
2025년 8월 6일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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