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시인선 144 김복희 시집
희망은 사랑을 한다
불
불을 오래 견뎠더니
불을 냈다는 소문이 났다
죽은 사람은 손쉬운 재료다
칼을 녹이지 않는 정도의 불
서성이며 일렁이며 만지는 마음
딱 그만큼의 불을 지키는 데 드는 연료가 있다
특별히 좋은 연료가 있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우는 사람은 불이 잘 붙는다
불은 지르는 것보다
지키기가 더 고단하다
태양을 오래 본 후에 눈물이 흐르도록 본 후에
번쩍이는 것들을 계속 가두어두면
곧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지만
어둠
나를 볼 수 있다
밝은 가운데 어두운 것을 보게 하는 연한 나를 따라간다
반딧불의 먹이는 작은 달팽이들이다
달팽이는 녹일 수 있다면 뭐든 먹는다
축축하고 서늘한 숲을 다 먹고
먹어서 흐리고
나지막하게
자신이 타오르고 있다고
설득시킬 필요는 없다
김복희 시집, 희망은 사랑을 한다
1
서성이며 일렁이며 만지는 마음. 딱 그만큼의 불을 지키기.
어둠 가운데 불 같은 슬픔이 타오르고 있다. 번지고 옮겨붙는다. 누군가는 불을 견디고, 누군가는 불의 곁을 지킨다.
나지막하게 자신이 타오르고 있다고 설득시킬 필요는 없다. 불은 소리를 내고 빛을 낸다. 그것이 쓸쓸하면서도 따뜻해 보인다. 축축하고 서늘한 숲을 다 먹는 달팽이, 그 달팽이를 먹는 반딧불의 불빛처럼. 나지막하게 타오르는 불. 우는 사람을 녹일 수 있다. 볼 수 있다.
2
개미색 구두 위로 개미가 기어오르는 그림을 내려고 우리는 덧칠을 배워 그늘을 만든다
- '완두콩 공주' 중에서 (같은 시집)
김복희의 시는 '개미를 그리기 위해 덧칠을 배워 그늘을 만드는 일'처럼 연약한 존재에게 다가가는 마음을 담고 있다. 그 속엔 '덧칠을 배우는' 노력이 있다. '그늘을 만드는' 배려와 존중이 있다. 그리하여 개미색 구두도, 개미도, 그늘도 검정은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실은 총천연색이었던 것이다.
3
지키고 지켜보기
태풍
무너지는 날에 비둘기는 어디로 가나
분명히 지켜보려고 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줄기도 제대로 보이지 않네
세상이 어둡고 나는 혼자가 아닌데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전부 썩기 시작한다
... (중략) ...
비둘기가 나에게 옮아왔다
- '검은 비둘기' 중에서 (같은 시집)
'불'이 옮겨붙은 것처럼 비둘기가 나에게 옮아왔다. 검은 비둘기였다. 그렇게 이 시집은 막을 내린다.
책을 덮고 생각한다. 무너지고 흐려지는 날이면 희망을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옮겨붙은 불을 지키는 사람, 비둘기를 지켜보는 사람을 그려 보아도 좋을 것이다.
희망은 사랑을 한다. 그것을 지키고 지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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