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감
2025. 2. 16.

창비시선 446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실감

 

 

 우리의 여행은 달이 없다는 전제하에 시작되었다

 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우리는 걷는 동안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달은 다르면서도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은 찾으려면 밤의 한가운데로 가야 한다는 내게

 너는 바다에서만 헤엄칠 수 있는 건 아니라 했고

 모든 얼굴에서 성급히 악인을 보는 내게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 냄새 같은 거겠지 말했다

 

 우리는 보폭을 맞추며 씩씩하게 나아갔다

 우리를 살게 만드는 힘은 온갖 종류의 그리움 같아 내가 말하면

 구름이 아름다운 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겠지

 핑퐁을 치듯

 

 이따금 일렁이는 불에 젖은 마음을 말려보기도 했지만

 언제나 시간은 거대한 장벽을 펼쳐 보일 뿐이었다

 

 달 없는 밤을 견디기 힘들었다

 고작 무릎까지밖에 안 오는 물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많았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

 우리는 신이 놓쳐버린 두 개의 굴렁쇠처럼

 

 하루하루를 굴려 잿빛 바다에 이르렀다

 

 고작 이런 풍경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일까

 너는 헤엄치는 법을 알아야만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내일부턴 더 추워지겠네 쓸쓸히 웃었다

 너무 어두워서 분명해지는 세계가 거기 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분명해지는 세계가 있었다

 안희연의 시를 읽으면 어떤 아득함을 실감한다. 헤엄치는 법을 모르는 채로 밤의 바다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것 같다.

 누군가 시를 '최소 언어로 최대 거리를 가는 일'이라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나는 징검다리처럼 놓인 최소한의 언어를 따라서 먼 거리을 걸었고, 잿빛 바다에 이르렀고, 내일부턴 더 추워질 것이란 예감에 쓸쓸한 웃음을 지었지만. 너무 어두워서 분명해지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렇게 비로소 슬픔을 실감하고 다정함을 실감한다. 더 멀리 가게 되더라도 손 뻗으면 닿을 것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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