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시인선 615 서윤후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
아무도 없는 우리
우리는 언제나 위독한 풍경 속에서 반짝이고
지상에 내려앉은 멧비둘기가
바닥을 겪고 더 높이 날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어
불행이 효능을 지켜냈거나
돌아갈 발자국이 모자라 이곳에 남겨진
우리의 입장과 다르지 않다
홀로 시소에 앉아 있는 아이는
솟구쳐 오르는 자신을 마주 보기 위해
아직 우리가 되어본 적도 없이
약속 시간을 어기기도 한다
서로를 지내다가 떠날 무렵이 된다면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어떻게 살아남는지를 구경하는 소실점 되어
우리는 매듭의 자리로 돌아가야지
서로를 가로지르는 뒤엉킴을 끄덕이기 위해
한 쌍의 그네가 동시에 흔들린다
닿지 않은 거리에서 엇갈림을 환호하다가
아무도 오지 않는 기억을 나눠 갖고
아이의 흰 마스크 안에는
우리? 반문하는 얼굴이 가득 젖어 있다
너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네가
멧비둘기를 멀리 날려 보낼 때
비어 있는 어깨동무
용서하기 위해 아침은 와 있는데
이 저녁을 어떻게 닫아야 하는지 모르고
떠날 채비 대신 눈 비비던 우리는
아무도 없는 우리를 다녀가기만 했다
우리는 언제나 위독한 풍경 속에서 반짝이고
시집 <나쁘게 눈부시기>엔 같은 제목의 시 한 편이 더 있다. 두 시는 연달아 수록되어 있는데 앞에 놓인 <아무도 없는 우리>는 이렇게 끝난다.
여름이면 떠올리는 것들
우리가 없어도 계속 재생되는 것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면 위에 옮겨 적은 <아무도 없는 우리>가 펼쳐진다. 이런 점이 마음에 든다. '우리가 없어도 계속 재생되는'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시를 읽는 내내 최근 본 영화 <해피엔드>를 떠올렸다.
위독한 풍경 속의 반짝임. 서로를 지내다가 떠날 무렵이 됨.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어떻게 살아남는지. 그것을 구경하는 소실점. 매듭의 자리로 돌아감. 서로를 가로지르는 뒤엉킴을 끄덕임. 동시에 흔들리는 한 쌍의 그네. 닿지 않는 거리에서 엇갈림. 우리를 반문하는 얼굴. 비어 있는 어깨동무. 와 있는 아침과 닫는 법을 알 수 없는 저녁. 떠날 채비 없이 눈 비비던 우리. 아무도 없는 우리. ...... 같은 말들이 스크린에서 보았던 얼굴들, 풍경들을 그려낸다.
흔들리며 맺히는 상. 공명하며 반짝이는 젊음.
아무도 없는 우리가 되었을 다섯 친구를 떠올린다. 아무도 없는 풍경. 텅 빈 옥상 위로 멧비둘기 한 마리가 높이 날고 있을 것만 같다.
여름이면 떠올리는 것들
우리가 없어도 계속 재생되는 것들
나에게도 계절마다 떠올리는 것들이 있다. 이름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풍경이 있다. 우리가 없어도 계속 재생되는 것들이다. 음악처럼. 되살아난다는 뜻이다.
'수의 초록 >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 (0) | 2025.04.21 |
---|---|
휘어진 칼, 그리고 매그놀리아 / 녘 (1) | 2025.03.24 |
나의 아름답고 믿을 수 없는 우연 (5) | 2025.03.17 |
실감 (2) | 2025.02.16 |
겨울 소설 (0) | 2025.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