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시인선 201 한여진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겨울 소설
바구니 가득 귤이 쌓여 있고
다 때려치우고 귤 농사나 짓고 싶다 생각한다
살려고 쓰는 나와
쓰기 위해 산다던 너와
어제와 엊그제와 모든 삶이
거대한 기록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책상 너머 너의 작은 뒤통수는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오늘도 쓰고 있다
쏟아진 귤들이 와르르 굴러가는 소리에
고개를 반짝 든 우리의 눈빛이 서로를 스치고
너를 귤 농장에서 처음 만났다고 쓴다
혼나지 않기 위해 귤을 따야만 했던 그때
우리 입가는 몰래 먹은 귤조각들로 가득했다
침대보엔 마른 귤껍질들이 뒹굴었고
우리가 속삭인 비밀들을 먹고 자란
귤나무는 다음해 무엇을 피워낼까
누군가 손톱으로 귤껍질을 찌른다
작은 교실에 향이 와르르 쏟아지고
작문 숙제를 하는 네 손톱 아래가
온통 노랗게 물든 것을 흘끔거리다가
계속 쓴다
이런 건 상품 가치가 없어!
마을 너머에 살던 어른들이 찾아와 항의를 했지
귤을 먹었더니 글쎄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게 됐다나
그건 귤껍질의 흰 속살처럼
달걀의 속삭임처럼 병아리의 마음처럼
작은 너와 나의
이야기들이었지
시커먼 팔꿈치를 핥고
독뱀을 잡아 멀리 풀어준 일을
어떤 나무는 악취 탓에 뽑히기도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도록 태어난 사람의 운명을
모든 여행자는 끝내 정착하고 만다는 사실을
가여워하던 너와 나의 전부가
속속들이 까발려지고
노래가 되었는데 그래도
끝나지 않던 얘기들
농장 주인에게 흠씬 맞은 날
황금빛 알갱이 같은 눈물이 툭툭 쏟아지고
다 때려치우고 글이나 쓰며 살고 싶다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무를 키워내고 또 귤 한 알 열릴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쓸 수 있는 것과
써야만 하는 것
그런데 사람들은 쓸모없는 건 돈 주고 사지 않는데
지금도 죽어가고 있는 우리가 그럴 수 있니
귤을 까서
서로의 입에 넣어준다
아직 숙제는 끝내지 못했는데
참 달고 새콤하다
다 때려치우고 따뜻한 귤이나 되고 싶다 생각한다
다 때려치우고 따듯한 귤이나 되고 싶다는 생각
이 시를 겨울이 가기 전에 옮겨 적어야겠다는 생각
'모든 것이 끝나도 /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한여진,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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