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의 시 271 양안다 시집
숲의 소실점을 향해
휘어진 칼, 그리고 매그놀리아
칼을 쥘 때 칼날을 쥐면 안 됩니다 애인을 타인의 이름으로 부르면 안 되듯이, 팔을 긋는 장면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듯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에는 금기가 너무 많았습니다
세상을 그렇게 이해해도 괜찮은 걸까요
아침마다 젖은 얼굴을 씻어낼 때
얼굴에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이가 있는데
이유만 타당하다면 누군가를 죽이는 것도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괜찮다는 마음, 우리가 함께 타다 만 숲을 지나갈 때 당신이 짓게 될 표정을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방화범이 누구냐고 묻고 싶겠지만 지금 나는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
인간은 왜 손안에 꽃을 쥐고 싶어 하는 걸까, 그 애는 그런 질문을 곧잘 했습니다 그 애와 함께 걷는 중에도 이상하게 나는 혼자라고 느껴지곤 했습니다
어두운 방, 한낮이었지만 창문 앞으로 새 건물이 지어진 탓에 빛이 들지 않던 나날이었습니다 라디오에선 하염없이 뉴스가 흘러나왔고 그 애는 사망자와 실종자 수를 종이에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 애가 잠깐 잠에 빠져들었을 때 나는 그 종이를 몰래 보았는데, 그곳엔 바를 정이 수도 없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 애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노트를 채가며 내게 물었습니다
"오늘 저녁엔 무엇을 할까?"
일기예보에선 폭우가 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빛이 기울면
연이어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세상입니다
호르몬이 망가질 때까지
금기가 없는 세상이라면
그곳은 꿈속일 거라고 그 애가 말한 적이 있는데
새벽에 그 애는 나를 작게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 애는 말했습니다, 일어나 봐 창문이 깨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어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그 애는 어딘가로 떠내려가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끌어당겼습니다, 저 바람이 우리를 집어삼킬까 봐 무서워
나는 그런 걱정은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말해주었지만 그 애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난 무서워
네가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게 무서워
......끝내 악몽을 외면한 채 눈을 감는 것입니다
차라리 위로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불타는 숲에서,
재와 연기 사이에서 비명이 흘러나오고
인간이 죽으면 저런 소리를 낼 수도 있구나
하지만
그 이유를 몰라서,
나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
양초 하나를 켜 놓은 채로
방화범이 왜 불을 질렀을지에 대해 말하려 합니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듯이
꿈속에 남겨지는 이들이 있고
괜찮다고
다 괜찮은 일이라고
그런데 혹시 말입니다
정말,
만약에 정말......
*
그날 잠에서 깬 나는 도통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에 짓눌린 듯 숨을 쉬기가 버거웠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이불 냄새를 맡았는데
문득 곁에 그 애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창문으로 백색의 빛이 들어오는 날이었습니다 그 빛은 따뜻하면서도 매우 평온하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불현듯 불안에 휩싸였고
그 애는 거실 바닥에 앉은 채로
한 손에 휘어진 칼을 쥐고 있었습니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반쯤 뜬 눈으로 그 애에게 다가갔습니다 가까이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것이 칼이 아니라 꽃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거실 바닥은 피로 흥건했습니다
그 애의 팔에도, 그 애가 쥔 꽃에도 피가 묻어 있었습니다 나는 놀란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습니다, 왜 피를 흘리고 있는 거야? 멀리 달아나려 한 거야?
그 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부르르 떨리는 팔을 보지 못했다면 그 애가 앉은 채로 죽었을 거라 여겼을 겁니다
나는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그 애의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그 애가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왜 분노하는지 모르겠어. 험한 말들을 쏟아내면서도 왜 살의를 감춰야 하는지 모르겠어. 아침에 나는 잠에서 깨어나 잠든 너의 얼굴을 보았지.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부푸는 표정을 바라보았어. 순간 나는 너의 목을 움켜쥐고 싶었어. 너의 얼굴을 배게에 묻어 버리고 너의 팔이 허공에서 헤매는 모습을...... 왜 그랬을까. 무슨 이유에서 그랬을까. 이런 마음에도 우연이란 게 작용하는 걸까? 나는 모르겠어."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그 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다시 물었습니다, 칼은 어디 있어? 칼은 어디다 두고 꽃을 쥐고 있는 거야?
꽃으로 그은 거야, 그 애가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습니다, 난 무서워 네가 태어난 날의 날씨는 어땠을지 궁금할 때가 있어 사랑은 무섭고, 전염이고, 결국 너는 날 죽일 거야 그렇지?
일기예보에서는 화창한 날씨라고 했습니다
"내일 보러 올게."
당연하게도 그 애는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는 눈물을 다 쏟고 나서야 잠기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빛이 기울고 나면
밤이 시작되는 세상입니다
그 애와 손잡고 걸을 때면
절반의 기도가 얼마나 절실한지 떠올리게 되고
두 손을 모으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누가 꿈이라는 걸 만들었기에
그 속을 헤매며 세상과 멀어지게 만드는 것일까요
마음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그저 내가 알고 있는 건
세상에는 금기가 너무 많다는 것
그런데 혹시 말입니다
정말,
만약에 정말......
*
그날 나는 거실에 고인 핏방울로
바를 정을 수도 없이 새기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이건 사랑 노래가 아니야
이건 사랑 노래가 아니야......
호르몬이 망가질 때까지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미 망가졌다는 사실을 모른 체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생각의 여름 (Summer of Thoughts) - 녘 (Moment) (노래 - 김일두 Kim Ildu)
옷장을 엽니다
입어본 적 없는 낯선
이 기분이 내일인가요
창문을 엽니다
있어본 적 없어 낯선
저 마당이 당신인가요
벽 너머가
밖이 아닐 수 있는지를
새벽 너머가
새로 밝을 수 있는지를
묻고 싶어요
당신에게요
과거는 인간을 잊지 않는다, 이 말은 우리들의 신조
세상 사람들은 과거를 잊은 듯 보이는데
<우리들은 프리즘 속에서 갈라지며 (상)> 중에서 (같은 시집)
끝내 악몽을 외면한 채 눈을 감는 내가 있어요.
괜찮다고 말했지만 저는 무섭습니다.
바를 정자로 셀 수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꿈속에 영영 남겨지는 사람들.
너무나 많은 금기, 세상을 금기로 이해한 나 자신까지 전부.
마음은 어디서 시작됩니까. 두 손을 모으는 사람의 마음은.
빛이 기울면 그림자가 기울고, 모든 빛이 기울고 나서 밤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새벽은 왜 기도로 시작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