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래에게
2025. 1. 1.

 

 

#1. 미래에게 | Notion

🍊 첫 번째 수요일 #1. 미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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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수요일 #1. 미래에게

 

 미래에게,

 안녕하세요. 첫 번째 수요일의 첫번째 편지를 전합니다. 2025년부터 저는 매달 첫 번째 수요일마다, 어디로든 부치고 싶은 말과 마음을 담은 편지를 쓰려고 해요. 누군가를 위해서 혹은 무언가를 위해서 쓰는 편지는 아닙니다. 따뜻함과 다정함을 오래 매만지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작은 바람 정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수취인불명의 편지 한 통을 매달 쓰기로 한 것입니다. 보내는 날을 첫 번째 수요일로 정한 이유는 글을 적고 있는 저의 이름이 ‘수’이기 때문이고요. 그럼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새해 첫날이 지닌 힘이 있다면 밝은 미래와 막연한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픈 마음이 샘솟는다는 것입니다. 해가 바뀌면서 어떤 스위치가 탁 켜지는 것처럼 마음의 전환이 이루어져요. 그런데 올해는 마음도 마음처럼 안 되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상 일은 아니더라도 나의 마음 하나쯤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불 꺼진 방에서 홀로 고요하게 새해를 맞으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나 봅니다. 미래를 마냥 반겨줄 수 없게 만드는 과거에 두고 온 마음이 있나 봅니다. 당신도 그런가요. 미래, 라고 가만히 발음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나요.

 

 

 


영동고속도로 끝에는 미래가

 

 

 미래, 라고 가만히 발음하면

 집 나간 엄마랑 고모랑 할머니가 떠오른다

 

 경제는 앞으로도 좋아지지 않을 거라는 뉴스를 보며

 다 먹었니? 삼촌은 졸린 눈을 비볐다

 

 불어터진 면발만 남은 우동 그릇 앞에서

 우리 조금만 쉬었다 가자고 말하지 않았지

 

 그날 삼촌의 트럭은 뒤집어지고 불타올랐다

 매일을 수년을 다니던 도로인데도 그랬다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가령,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 같은 것

 

 그러니 영동고속도로에는 언제나 들이받고 싶은 것들로 가득해서

 아무리 우동을 먹어도 허기가 가시질 않고

 

 쪼그라든 할아버지는 자주 울었다

 할아버지 무슨 생각 해? 하면 자꾸만

 미안합니다 그만 용서하세요라는 그의 앞에서

 

 저기 나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아, 하는 대신

 이제 인류는 곧 하늘을 날 수도 있다고 속삭여주었다

 두고 봐, 할아버지보다 내가 더 먼저 갈 거야

 

 우리집 사람들의

 이리도 한결같은 최후

 

 그리고 다 커버린 나는 노란 조끼를 입고

 안전봉을 흔들며 영동고속도로 위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아직도 앞으로만 달릴 줄 알고

 그중에 집 나온 사람과 끼니를 거른 사람과

 기억을 지운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가로등, 켜지고 꺼지고 수없이 반복될 때

 어느 날에는 차에 치인 고라니를 갓길로 끌고 가 웃옷을 덮어주었다

 

 그때 저 멀리서 새끼 고라니 한 마리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속으로 그애에게 미래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조그마한 귀를 펄럭이며 이쪽을 바라보던 미래가

 이내 몸을 돌리더니 절뚝이며 멀리 뛰어가기 시작했다

 

 미래,

 

 에게,

 

 

 

한여진, 「영동고속도로 끝에는 미래가」
(문학동네 시인선 201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중에서)

 


 

 미래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한여진 시인의 시, 「영동고속도로 끝에는 미래가」 입니다.

 

 

 상실의 슬픔은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미래라는 것은 상실을 지나 소멸에 도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이리도 한결같은 최후’가 미래라고 할 수도 있겠죠. 다만 시에 등장하는 ‘나’는 ‘도무지 미래가 보이지 않아’라는 말 대신 ‘이제 인류는 곧 하늘을 날 수도 있다고’ 희망을 속삭입니다. 살아가는 일은 끝없는 허기처럼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지만, 애틋한 얼굴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커버립니다. 노란 조끼를 입고 안전봉을 흔드는 영동고속도로 위의 ‘다 커버린 나’의 모습.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당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다 커버린 당신. 앞으로만 달릴 줄 아는 사람들 속에서 저는 당신이 슬픔을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어요. 그 돌아봄의 용기가, 돌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고라니에게 웃옷을 덮어주듯이. 새끼 고라니에게 미래라는 이름을 붙여주듯이.

 다시 한번 미래를 미래, 라고 가만히 발음할 때,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주위를 돌아보고 또 돌보는 사람의 낙관이 그려지면 좋겠어요. 돌보는 이의 낙관이 그렇게 봄이라는 미래가 된다면 좋겠어요.

 

 

 미래에게, 라는 말로 시작한 오늘의 편지가 미래의 저에게도 닿길 바라며, 첫 편지에선 이 시와 함께 이런 말들을 꼭 하고 싶었어요.

 

 

 


 

계피 동요집, <빛과 바람의 유영>

 

 시와 함께 전하고 싶은 노래가 있어요. 계피의 동요집, <빛과 바람의 유영>에 수록된 2019라는 곡입니다. 앨범 속 다른 트랙들은 모두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만들어진 동요들이에요. 음반 소개 글에서 계피님은 이 동요들이 아름다운 멜로디 속에 어떤 그림자를 담고 있다고 말합니다.

 

 

-

 

 소식을 알 수 없이 헤어진 오빠(오빠생각), 꽃을 좋아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꽃밭에서), 나만 외떨어진 바보인 것 같은 외로움(개똥벌레), 생활고 때문에 아이를 홀로 남겨두고 일을 하는 엄마(섬집아기), 어쩌면 다시 갈 수 없는 황금빛 강변의 집(엄마야 누나야)이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 동요들이 만들어지던 시대와 지금은 사회적 상황이 달라졌고, 아이들의 경험도 그 때와는 많이 다르겠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그림자는 아이들의 빛과 바람 속에 남아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 (중략) …

 

 커버의 그림에는 마음을 다친 아이가 홀로 숲에 소풍을 와 있다. 신록의 이파리와 꽃이 흩날리는 황홀한 풍경 속에서도 아이는 쓸쓸해보인다. 소풍을 마치고 돌아갈 때 쯤은 아이가 빛과 바람의 힘으로 그림자도 버틸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집에 도착했을 때는 그 아이를 가족들이 꼭 껴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 계피

(<빛과 바람의 유영> 음반 소개 중에서)

 

 

 

 기회가 된다면 앨범의 다른 트랙들도 함께 들어보시기를 바라요.

 이제 이 노래를 빌려 남은 말을 대신 전하겠습니다.

 

 

 

2019


눈을 뜨면 내 얘길 들어줘

네게 하고 싶은 말들이 있어

언제까지라도 함께 하고 싶다던

너의 고백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하지

모든 겨울을 지나왔을 네게

이 봄을 담아서 온기를 담아서

노래 부를게

 

너와 함께 걷던 서교동 거리에

지금은 비가 내려 세상은 촉촉하게

이 비가 그치고 햇살이 내리면

잠에서 깨어날 너

 

미래는 한 걸음씩 우리 곁을 찾아오고 있고

우리의 항해는 이제 여기 시작되려 하지

푸르게 피어날 4월의 노래 네게 주고 싶어

우리는 올해도 죽지 않고 살아갈 거야

 

미래는 한 걸음씩 우리 곁을 찾아오고 있고

우리의 항해는 이제 여기 시작되려 하지

푸르게 피어날 4월의 노래 네게 주고 싶어

우리는 올해도 죽지 않고 살아갈 거야

 

살아갈거야

 

 


 

저는 미래로 나아갈 당신이, ‘빛과 바람의 힘으로 그림자도 버틸 수 있는 용기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미래는 한 걸음씩 우리 곁을 찾아오고 있고
 우리는 올해도 죽지 않고 살아갈 거예요.

 

 

 2025년 1월
 정수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