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2024. 10. 20.

문학동네시인선 201 한여진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한여진 시집,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인터뷰

 

 하나의 단어

 그는 이제까지의 내 인생을 하나의 단어로 요구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 아침마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뭉게구름처럼 찬물 한잔으로 풀어지는 생각들, 삼십 년 산 책장에 가득한 책들, 읽어본 것들과 앞으로도 읽지 않게 될 페이지들, 어떤 페이지에서는 도저히 멈출 수밖에 없던 이유들, 이 모든 것들을 단 하나로,

 

 하지만 나는
 깨자마자 잊히는 내 꿈의 주인공
 멈춰버린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상상들까지
 단 하나일 수 없는 나

 

 그리고 다시 넘쳐나는 생각과 생각들, 코와 입과 눈 밖으로 흘러내리고 지금도 흘러내리는 중인 보이지 않는 생각들이 매일 밤마다 나를 덮치고 그것들과 싸워 이기면 건강한 내가 되고 그러지 못한 날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건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 드는 나를, 한 단어로, 그렇다면,

 

 나는 의자이며
 나는 기차고
 나는 파도라서

 

 내일은 갈매기일수도 있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까

 

 그와 내가 있는 방
 그와 나 사이에
 금빛 모래가 밀려오고
 다시 밀려나간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수한 모래 알갱이들, 작은 것들이 모여 서로 몸을 비비면 더욱 반짝인다는 것을 언젠가 그도 알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지루한 표정으로
 손목의 시계와 닫혀 있는 문을 번갈아 바라보고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 나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나
 이름과 성별과 나이와 출생지와 거주지에 대해 또한 점수와 순위들에 대해,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가 바라는 것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과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바라는 것을 때때로 모르는 척하는 사람 중
 내가 어디에 더 가까운 사람인지 나는 알 수 없고
 그도 결국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지금의 나는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고

 

 내가 성실하고 함부로 질문하지 않고 언제나 단정한 옷차림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당신이 원하는 그런 사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보여줄 수밖에

 

 내 꿈이 한때는 예민한 후각을 가진 시인이었고 밤마다 몰래 이웃의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는 화가였고 부드러운 손바닥을 지닌 병아리 감별사였다는 것을

 

 일기장을 가져올 걸 그랬지

 

 한 문장
 두 문장
 다시 한 문장
 사실은 훔쳐온 문장들이 너무 많았고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해서 언제나 일기를 끝내지 못했고 시작도 못하는 날들이 있었고 그러니까 단 하나로는 도무지 안 돼서 줄줄 흘러넘치는

 

 나는 조이스틱, 인공지능, 한때 잘나가던 경주마,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가도 내가 되지 못한 것들과 내가 두고 온 것들에게 자꾸 마음이 가서 때때로 멈출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의 단어,
 나는 그것을 거부하고

 

 그의 예의바른 미소와
 문 뒤에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앞에서
 흘러넘친 나를 그대로 두고 온다

 

 무수한 단어들이 흐른다

 

 

 


지금의 나는 나의 쓸모를 증명해야 하고

 지금의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가도 내가 되지 못한 것들과 내가 두고 온 것들에게 자꾸 마음이 가서 때때로 멈출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의 단어로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다만 시를 옮겨 적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지는 마음이 있다. 

 

 


나에게도 나만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이 있다고 하면 보지 않을래?

...

말랑한 것들, 역사가 아닌 것들, 기록되지 못한 것들, 내가 나일 수 없던 것들, 그것들에게 이름 붙여주는 일을 하겠다고 ...

 

- 한여진, 「제목 없는 나의 노래와 시와 그림과 소설」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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