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어
2024. 10. 5.

창비시선 446 안희연 시집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스페어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힌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나를 도려내어 작아지는 것이 성장이라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 모든 것들에 절단면을 포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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