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시인선 202 고선경 시집
샤워젤과 소다수
수정과 세리
나는 수정과 세리를 대학교에서 만났다 우리는 자주 우리였고 서로의 뿔을 아꼈다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같은 무구함
이미 젖은 휴지로 물이 흥건한 테이블을 닦았다
테이블은 언제나 다리 하나가 모자랐다
우리는 그곳에 둘러앉아 커피를 마셨고 책을 읽었고 글을 썼고 잡담을 나눴고 이내 늙어버렸다 뿔이 닳아버렸다 서로를 해독하느라
소음이 가득했던 날들
아무도 망가뜨리지 않았는데 저절로 망가지던 스물
수정아
세리야
견딜 만한 불행 앞에서 우리는 참 기계적으로 슬펐어
주머니는 있는데 외투가 없었어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을 미리 깨뜨려두었어
수정은 의연했고
세리는 아연했다
얘들아 문예창작과는 더 슬픈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 아니야 더 재미있어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야 계속 지고도 다음 판으로 넘어가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수정과 세리는 다 알고도 번번이 져주었다 번번이
내가 이기고 싶어해서
그런데 이긴다는 게 뭔지 생각하다가
생각하다가
교정에 불던 봄바람
그건 정말 뭐였지? 이마를 긁적이며
오래 질문하였다
물기를 빨아들이고 무거워진 휴지를
벽에 던지면 철퍽 하고 우스운 소리가 났다
얘들아 우리는 우스운 소문이 되자
그런 건 해독하지 않아도 돼
수정은 고요하게 깨질 줄 알고
세리는 기계적인 웃음을 모른다
교정에 핀 개나리가 한낮의 별처럼 희미하게 흔들릴 때 우리는 참 시끄러웠다 닫힌 문을 모조리 열고 다녔다
이제 깨지기 직전의 유리컵 같은 예민함은 없지만
시간의 긴 뿔을 부러뜨려 잠긴 문을 여는 능숙함이 남았지 도둑처럼
문 안팎의 소문을 훔쳐다가 다시 뿔을 벼리는
우리는 학교 바깥에서 만났다 헌옷 수거함 같은 표정으로 만나 빈 주머니의 소음을 공모했다
모두가 져버려서 아무도 지지 않는 게임을 도모했다
깔깔 웃는 것으로 끝나는
시작되는
수정아
세리야
가느다란 가지에 주렁주렁 맺힌
한밤의 개나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무구함 회상
왜 사람은 바깥이 추워지면 안을 들여다보게 될까요. 추워지고 나서야 외투를 꺼내며 주머니는 있는데 외투가 없는 사람의 무구함을 생각합니다. 외투 같은 건 애초부터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닐까요.
오늘 꺼내 입은 외투엔 주머니가 많습니다. 대부분이 빈 것이어서 외투는 있는데 주머니가 없는 사람이 된 기분입니다. 텅 빈 것과 무구한 것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빈 주머니의 소음을 공모하는 것으로 맞이하는 겨울입니다. 추워지는 만큼 따뜻해질 수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적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