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
2024. 10. 4.

문학동네시인선 114 권민경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중에서

 


안락사

 커튼 뒤에서 잃어버린 어제를 찾았죠.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머리맡엔 단단한 구름과 말캉한 악몽이 쌓이고, 기억들을 팡팡 털어도 베개는 풍성해지지 않아요. 부풀어오르지 않아요. 걸어온 길들은 푹 꺼져서 다신 되돌아오지 않아요.
 침대는 흰 배를 내 놓고 앉아 있어요. 커튼을 치면 종기처럼 별이 돋아나고 터진 잠 속에서 깃털들이 솟구쳐요. 재채기가 나와요. 콧등은 주름지고 우리의 날들도 구겨져요. 지폐를 구기면 낯선 얼굴이 우릴 바라보는 것처럼 구겨진 삶이 우릴 바라보고 웃고 울어요. 그 새침하고 가여운 얼굴 속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눈물도 흘려요.
 바뀐 요일을 입으면 기운이 새로 솟아요. 오늘 자고 일어나면 또 얼마나 열매가 많은 날이 펼쳐질까요. 얼마나 많은 잘린 머릴 목격할까요. 별들이 태어나고 숲이 타오를까요. 이 한잠만 자고 일어나면……
 부러진 나무들이 일어나요. 번개가 기지개 켜요. 온 들판에 불이 일고, 우리의 수많은 잠들이, 꿈들이 하나하나 낯익은 얼굴이 되어 찾아와요. 못다 한 인사를 커튼 뒤에 감추고
 나는 잠들기 전에 내가 가진 모든 하루를 생각해요.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잃어버린 어제를 찾았죠. 저는 어제 잃어버린 것들을 전리품처럼 움켜쥐고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시작해요. 가을의 하루는 24시간보다 짧게 느껴져요.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수없이 많은 다짐들을 잃어버려요.
 올해 9월은 가을보다 늦여름이라는 이름이 어울렸어요. 길고 길었던 여름은 한낮의 비구름과 함께 사라진 것 같아요. 거짓말처럼. 꿈처럼. 누군가는 여름의 특성을 견디는 것이라 하더군요. 여름을 좋아하게 된 저는 그 표현을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지금 하고 싶은 말은 잘 견뎠다는 말. 오랜 시간을 견디느라 고생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여름을 보내주던 날, 저는 우산을 하나 잃어버렸어요.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던 것을 잃어버렸을 때 엄습한 안도감은 무엇이었을까요. 잃어버리지 않고서는 결코 버릴 수 없는 것도 있겠죠. 푹 꺼진 베개를 베고 편안한 잠을 청하고 싶은 가을밤입니다. 

 

2024년 10월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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