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2024. 10. 5.

김애란 장편소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2024, 문학동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연약하기에 섬세해질 수 있는 이야기가 마음을 지긋이 누를 때

  고등학교 2학년 지우, 소리, 채운의 이야기. 각각의 '이야기'들에 숨을 불어넣는 섬세한 문장들이 참 좋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한 편의 소설이 먹먹하고 아름다운 성장기가 될 때, 잊고 있던 나의 한 시절에 빛이 드리우는 듯 하다. 어떻게 보면 보편적인 생의 감각이다. 특별하지 않은, 흔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안에서 연약함과 섬세함이 빛날 뿐이다. 내가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연약하기에 섬세해질 수 있는 이야기가 여기 있다.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끝이…… 있어서? 
-난 반댄데. 
-뭐가?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소설 속에선 수많은 이야기가 맞물린다. 지우와, 소리, 채운은 모두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다. 이야기엔 끝이 있고 시작이 있다. 끝의 시작, 시작의 끝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는 이어진다. 접속사 없이도 이야기는 흐른다.

 

 

 채운이 생각하기에 논리로 설명 가능한 일은 대부분 ‘그래서’와 ’그런 뒤’ 다음에 일어났다. 반면 흥미를 끄는 쪽은 ‘그런데’나 ‘한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접속사 없이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었다.

 

 

 접속사 없이도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있다. 지우, 소리, 채운의 이야기가 그렇다. 각자의 슬픔에 뿌리 내린 셋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또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며 깊어진다. 

 

 

 

 

 

 

 

‘하지만 삶은 이야기와 다를 테지. 언제고 성큼 다가와 우리의 뺨을 때릴 준비가 돼 있을 테지. 종이는 찢어지고 연필을 빼앗기는 일도 허다하겠지.’ 누군가 집을 떠나 변해서 돌아오는 이야기, 지우는 그런 이야기를 많이 알았다. 하지만 그 결말을 잘 믿지는 않았다. 누군가 빛나는 재능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재능이 구원이 되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에 몰입하고 주인공을 응원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이야기라 여기지는 않았다. 지우는 그보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자신이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는 이야기, 그래도 괜찮음을 알려주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떠나기, 변하기, 돌아오기, 그리고 그사이 벌어지는 여러 성장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그냥 돌아갈 뿐이라고,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당시 자기 안의 무언가가 미세히 변했음을 깨닫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리 삶의 나침반 속 바늘이 미지의 자성을 향해 약하게 떨릴 때가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그런 것도 성장이라 부를 수 있을까? 시간이 무척 오래 걸리는데다 거의 표도 안 나는 그 정도의 변화도? 혹은 변화 없음도? 지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다만 거기에는 조금 다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지우는 그 과정에서 겪을 실망과 모욕을 포함해 이 모든 걸 어딘가 남겨둬야겠다 생각했다. 그런 뒤 저쪽 세계에서 혼자 외롭고 두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엄마와 용식에게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래전 엄마가 자신에게 늘 그래줬듯이. 활짝 펼친 그림책 앞에서 한 손으로 자신의 눈썹을 꾹 누르며 “빛이 나왔습니다” “낮이 생겼습니다”라고 해주었듯이. 아무리 같은 줄거리가 되풀이돼도 항상 새롭게 놀라는 척해주었듯이 말이다.

 

 

 

 삶은 그렇게 이야기가 되지만 삶과 이야기는 다르다.

 이야기는 결국 남겨지는 것이며, 그럴 때 삶은 이야기를 잘라낸 나머지가 될 것이다. 

 안희연 시인의 시, <스페어>를 빌려 성장의 다른 이름을 말하고 싶다.

 

 


스페어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자 한봉지가 놓여 있을 뿐

 

 저 감자는 정확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싹이 아니라 독이지만

 저것도 성장은 성장이라고

 

 초록 앞에선 겸허히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바라본다

 

 하지만 싹은 쉽게 도려내지는 것

 먹구름이 지나간 뒤에도 여전히 흐린 것은 흐리고

 

도려낸 자리엔 새살이 돋는 것이 아니라

도려낸 모양 그대로의 감자가 남는다

 

아직일 수도 결국일 수도 있다

숨겨놓은 조커일 수도

이미 잊힌 카드일 수도 있다

 

나를 도려내고 남은 나로

오늘을 살아간다

 

여전히 내 안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 내가

나머지의 나머지로서의 내가

 

 

 

스페어

창비시선 446 안희연 시집    스페어  진짜라는 말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 같아 단 하나의 무언가를 갈망하는 태도 같은 것  다른 세계로 향하는 계단 같은 건 없다 식탁 위에는 싹이 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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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도려내어 작아지는 것이 성장이라면 홀가분한 마음으로 세상 모든 것들에 절단면을 포개고 싶다.

 

 

 

 

(작가의 말 중에서)
 삶은 가차없고 우리에게 계속 상처를 입힐 테지만 그럼에도 우리 모두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다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2024년 늦여름 
김애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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