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렁탕
2025. 1. 10.

설렁탕

(고명재 산문,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중에서)

 

 

설렁탕

 

 

 가끔 부모님이 가게 일로 밥도 못 먹고 아주 늦은 시간에 마치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 두 사람은 설렁탕집에 가서 뜨끈한 국물을 먹고 집으로 왔다. 종일 남의 밥만 차리다가 뽀얀 국물을 먹고 오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는 거였다. 설렁탕은 왜 이름이 설렁탕이야? 물으면 엄마는 명쾌히 즉답을 했다. 이 탕은 아주 오래전 극도로 추운 지방에서 만들어졌는데 끓이는 시간이 하도 오래 걸려서 국솥에 눈이 자꾸 빠졌지 뭐니. 그래서 설雪렁, 눈의 수렁이라는 뜻. 흰 탕 속엔 눈의 흰빛도 녹아 있겠지.

 

 

 나는 이 이야기를 중학생 때까지 정말로 믿었다. 알고 보니 우리 집안의 장난꾸러기께서 마음껏 지어낸 이야기였다. 마음껏 지어낸 이야기 속엔 늘 시가 있다. 시 속에는 사실이 없어도 진실은 있다. 지금도 내게 설렁탕은 겨울의 음식. 눈의 흰빛처럼 뽀얗고 파가 어울리는 것. 늙은 부모와 나란히 설렁탕을 먹는다. 겨울에는 파도 한층 달콤해진다. 탕湯은 본디 나누어 먹는 마음에서 비롯된 조리법. 가난한 시절엔 여럿이 함께 먹어야 했다. 독식이 아니라 공식. 함께 살아가는 꿈. 그것은 가축을, 마음을, 죽은 육체와 살점을, 슬퍼하며 한데 섞어 삼키는 일이다. 그래서 '탕'은 '국'의 높임말이기도 하다. 국보다는 격이 높은 국물이라는 것. 이런 건 대개 시간과 품이 많이 든다.

 

 

 

 


눈의 수렁에는 온기가

 

 겨울엔 설렁탕 생각을 자주 합니다.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와 함께 설렁탕을 먹으러 가곤 했던 시절. 그때의 기억을 새하얀 수렁에서 건져올립니다. 설렁탕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옮겨 적습니다.

 

 고명재 시인의 글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온기가 있어서 좋아요. 키우는 사랑. 사람을 길러내는 사랑이 글자 속에 녹아 있어요. 그 온기 어린 문장들을 되뇌면 '겨울은 가장 추운 계절이지만 역설적으로 따뜻한 이미지로 기억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죠.  

 

 그러다 외할머니 생각을 합니다. 저를 키운 사랑과 설렁탕 생각을 합니다. 시간과 품이 많이 드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존재를 초월해 존재하는 마음이란 게 있을까요. 설렁탕집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마음 같은 게.

 

 어제도 오늘도 정말 춥네요. 내일은 백발 같은 눈이 온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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