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화서
2024. 9. 19.

무한화서 (문학과지성사)

 

무한화서 (2002-2015, 이성복 시론)

 

 자서에 따르면 <무한화서>는 2002년부터 2015년까지, 이성복 시인의 대학원 시 창작 강좌 수업 내용을 아포리즘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책은 시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카피를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시'의 자리에 '카피' 혹은 '글'을 대입해 읽고 생각하는 재미(?)가 있었다. 꼭 시가 아니더라도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문장들이 많았다.

 

 나에게 있어 시 읽기의 즐거움이란 한 편의 시가 마음껏 오해해도 좋은 세계라는 점에서 오는데, 생각해 보니 나는 시론마저 내 마음대로 오해하며 읽어버린 것이다. 퍽 우습고 재밌다. 때마침 오늘 <소설 보다 가을 2024>의 '권희진X이소 인터뷰'를 읽었는데 "모든 이해가 모종의 오해이고 모든 오해가 일종의 이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언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

 

0
 ‘화서’란 꽃이 줄기에 달리는 방식을 가리켜요. 순우리말로 ‘꽃차례’라 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성장이 제한된 ‘유한화서’는 위에서 아래로, 속에서 밖으로 피는 것이고(원심성), 성장에 제한이 없는 ‘무한화서’는 밑에서 위로, 밖에서 속으로 피는 것이에요(구심성). 구체에서 추상으로, 비천한 데서 거룩한 데로 나아가는 시는 ‘무한화서’가 아닐까 해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다 끝없이 실패하는 형식이니까요.

 

 

25
 머릿속 의도대로 쓰는 시는 언어에 대한 횡포예요. 머리에서 언어를 구출하고, 몸에서 언어를 춤추게 하세요. 그러면 나도 언어도 행복해져요.

 

 

39
 항상 입말에 의지하세요. 가볍고 쉽게 사라지기 때문에, 입말이 소중한 거예요. 우리 누구나의 인생처럼……

 

 

47
 아무리 슬픈 사연도 말하고 나면 고통이 줄어들어요. 아무리 고된 노동이라도 노래에 실리면 힘든 줄을 몰라요. 리듬 때문이지요. 그건 일의 리듬이고 몸의 리듬이에요. 계단 잘 내려가다가도 ‘조심해야지’ 하면 걸음이 엉켜 비틀거려요. 몸 하는 일에 머리가 개입해서 생기는 혼란이지요. 시 쓸 때도 머리보다 몸에 맡기도록 하세요.

 

 

59
 평소 하는 말인데, ‘도망가는 어떤 말’이 시예요. 한 행 뒤에 다음 행을 이을 때는, 같으면서도 다른 것이 와야 해요. 마지막 행이 어떤 것이 될지는 가봐야 알아요.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는 죽을 때 돼야 알 수 있잖아요.

 

 

76
 정작 할 얘기를 안 하기 때문에 말이 많아지는 거예요. 지금까지 한 말 모두 지워버리고, 말 다 했다고 생각한 데서 새로 시작해보세요.

 

 

81
 이미 그려진 그림에 덧칠하고 개칠하지 마세요. 시적 의미는 기존의 의미가 파괴되는 순간 태어나요. 모든 의미는 무의미의 사막 위에 신기루처럼 왔다 가요. 가능한 한 무의미를 오래 견디는 것이 시의 덕목이에요.

 

 

95
 ‘햇빛이 빛난다’ 이건 사구예요. ‘햇빛이 울고 있다’ 이러면 활구에 가까워요. 활구에는 언제나 말의 각이 있어요. 행과 행 사이에도 각을 세울 수 있어요. ‘햇빛이 울고 있다. 어디서 본 얼굴이다.’

 

 


[대상]
시의 외양은 시답잖은 것

 

103
 사건을 단순하게 가져가세요. 그래야 시가 우러날 틈이 있어요. 시는 사연에 올라타는 것이지, 사연 그 자체가 시는 아니에요. 사연 가지고 시를 만들려 하는 대신, 사연이 삶의 은유가 되도록 하세요.

 

 

104
 시 쓸 떄는 대상을 앞에서 끌지 말고 뒤에서 밀어줘야 해요. 그처럼 소극적 자세를 취하는 게 가장 어렵고 중요한 문제예요. 오직 힘 있는 사람만이 ’소극적 능력’을 가질 수 있어요.

 

 

118
 지금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허위의식이에요. 우리가 내버리는 것들 안에 진짜 우리가 들어 있어요. 그중에는 보기 싫어 버리는 것도 있고,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고 버리는 것도 있어요. 언제나 버림받은 것들을 귀하게 여기세요. 세상에서 버림받은 것들을 구제하는 게 문학이에요.

 

 

126
 특이한 것들은 내가 더 보탤 게 없어요. 항상 평범한 것들을 비범한 쪽으로 가져가세요. 누구나 평범하게 태어나고 평범하게 죽어요. 그것 말고 특이한 게 뭐 있겠어요.

 

 

129
 세상에서 의미 없는 건 하나도 없어요. 모든 미친 것들에게, 미치지 않으면 안 될 사연 하나씩 찾아주는 게 시예요.

 

 

139

 시는 깨끗한 눈사람보다, 눈 녹은 자리에 고인 약간의 물 같은 거예요. 시는 만남의 기쁨보다 먹먹한 기다림을 더 소중히 여겨요.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 오래 기다려진 것, 이미 녹아버린 것 말고 시가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143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걸 보여줘요. 앞모습은 위장할 수 있어도, 뒷모습은 속일 수가 없어요. 대상의 뒷모습을 포착하는 시는 조용하게 다가오지만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요.

 

 

156
 시의 외양은 잡생각이고 시답잖은 농담이에요. 문제는 거기서 묻어나는 아득함과 막막함이에요. 시는 비근하고 허접한 것들의 급소를 건드리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는 거지요.

 

 

159

 아무리 비현실적인 것이라도, 비현실적인 바탕을 만들어주면 현실적이 돼요.

 

 

178

 한달음에 쓰세요. 생각이 들어가면 시간과 장소가 흩어지고, 사건의 흐름이 깨져요. 생각은 평소에 하고, 글 쓸 때는 아예 하지 마세요. 하지만 우리는 늘 반대로 하지요.

 

 


[시]
삶을 바꾸는 대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일

 

213

 시는 의미를 유예시키거나 정지시킴으로써 독자를 무감각에서 깨어나게 해요. 우리 몸 어딘가에 아픈 구석이 늘 있듯이, 시에도 아픈 구석이 하나씩 있어야 해요.

 

 

243

 ‘피아노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얘기예요. “나는 음표는 몰라도, 쉼표 하나는 다른 연주자들보다 잘 연주할 수 있다.” 참 무서운 말이에요. 이런 느낌의 시를 쓸 수 있다면, 부처님처럼 제 몸을 나찰에게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거예요.

 

 

253

 시는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해요. 시를 쓸 때는 일단 모르는 데서 시작하세요. 모르는 쪽으로 손을 벌리고, 모르는 쪽에 기대야 해요. 진정한 시는 한번도 시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이에요.

 

 

260

 좋은 사람 좋아하는 게 무슨 사랑이겠어요.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게 사랑이지요. 그처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게 시가 아닐까 해요.

 

 

264

 정말 좋은 철학은 철학이라는 느낌이 없어요. 너무 진지하고 심각한 얘기로 독자에게 부담감 주지 마세요. 내 생각은 그냥 먼 바다에 툭 던져놓고, 딴 얘기만 하세요. 말의 에너지는 묻어둘수록 커져요.

 

 

265

 문학은 무언가 만들어서 얻게 되는 게 아니고, 버려서 얻어지는 거예요. 세상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다 버린 다음이 문학이에요. ‘얻으려 하면 잃을 것이고, 잃으려 하면 얻을 것이다’라는 말은 문학에도 해당돼요.

 

 

275

 다 보고 나서도 한 번 더 봐야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남의 말 들을 때는 말과 말 사이 침묵도 같이 들어야 해요. 이것이 정말 끝이라고 생각하는 지점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해요. 빛이 사라져도, 사라졌다는 그 느낌은 남아 있잖아요.

 

 

287

 삶을 바꾸는 대신,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려는 게 글쓰기예요.

 

 


[시작 詩作]
진실한 말을 낮은 목소리로

 

315

 일전에 하도 글쓰기에 자신이 없어서 적어본 거예요. -내가 쓴 글은 내 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정확히 나의 글이다. 왜냐하면 내 글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쓸 수 없는 것들은 언젠가 다른 글에서 다른 방식으로 씌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내가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써야 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아무 생각 없이 빨리 써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몸과 기억이 함께할 것이기 때문이다.

 

 

318

 시인은 상주보다 더 슬플 수 있어요. 곁다리라서 본질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이지요.

 

 

319

 시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 다른 것에 대한 이야기예요. 또 어떤 것에 대해 얘기해도 시에 대한 이야기가 돼요. 목숨 걸고 시에 매달리지 마세요. 그러면 시도 잃고 다른 것도 잃게 돼요.

 

 

330

 시보다 시작노트가 좋은 경우가 많아요. 시 쓸 때는 시작노트 쓰듯이 하라는 말도 있지요. 쓴다는 의식이 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부자연스러운 말을 하게 돼요. 피아니스트의 뒷모습을 보면 어떤 소리가 날지 알 수 있다고 하지요. 골프나 테이스에서처럼 시도 어깨에 힘이 빠져야 ‘원 샷’으로 갈 수 있어요.

 

 

362

 대화는 남의 기분을 살피고 남의 뜻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에 위선이 많아요. 그러나 혼잣말은 늘 진실해요. 혼잣말하면서 거짓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시는 자기한테 하는 말이에요. 진실한 말은 항상 목소리가 낮아요.

 

 


[삶]
문제는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태도와 방향

 

416

 스스로 비유를 만들 수 있는 것만이 나의 앎이고, 내가 아는 것만이 나이 삶이에요. 남이 만든 비유를 사용하는 건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것과 같아요.

 

 

422

 프랑스에선 말을 삼킨다 하고, 일본에서는 울음을 삼킨다 하지요. 선은 묻어둘수록 힘이 있고, 슬픔은 감출수록 커지는 거예요. ‘슬픔이란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는 걸 표현하는 게 문학이에요. 시는 자기를 풀어헤치는 게 아니라 졸라매는 거예요.

 

 

426

 어떤 사람의 나쁜 점을 보면 좋은 점이 안 보여요. 하지만 좋은 점을 보면 나쁜 점도 같이 보여요. 작은 것을 보면 그 뒤의 큰 것이 안 보여요. 하지만 큰 것을 보면 그 안의 작은 것도 같이 보여요. 모든 게 선택의 문제예요. 우리가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선택의 결과예요.

 

 

430

 왜 자기 눈에는 자기가 안 보일까?

 

 

436

 삶과 글은 일치해요. 바르게 써야 바르게 살 수 있어요. 평생 할 일은 이 공부밖에 없어요. 공부할수록 괴로움은 커지지만, 공부 안 하면 내 다리인지 남의 다리인지 구분할 수 없어요. 젠체 안 하고 남 무시 안 하려면 계속 공부해야 해요. 늘 문제되는 것은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태도와 방향이에요.

 

 

448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의 주인이고, 모르는 것의 하인이라 하지요. 어떤 것을 이해하는 순간, 그것이 우리를 놓아줘요. 삶과 죽음을 함께 보고, 부분에서 전체를 보도록 해야 해요.

 

 

454

 보는 건 왜곡이 심하고 주관적이에요. 구두를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하면 구두밖에 안 보여요. 왜? 보는 건 마음속에 있는 걸 보기 때문이에요. 자기 내면의 ‘이야기’를 보는 거지요. 하지만 듣는 건 달라요. 들을 때는 내 할일이 별로 없어요.
 …
 듣는 건 침묵하는 거예요. 입 다물고 있어도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지나가면 침묵이 아니에요. 보이지 않는 ‘수다’일 뿐이지요. ‘침묵 silent’이라는 말 안에는 ‘듣는다 listen’는 말이 들어 있어요. 무조건 들어야 해요. 그러면 말을 안 줄여도 자연히 침묵하게 돼요. 들으면 불만이 없어져요. 듣는 건 존중하는 거예요.

 

 

 

'수의 초록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 하나는 거짓말  (3) 2024.10.05
무겁고 높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4) 2024.0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