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볼 팀플레이
2024. 9. 10.

문학동네시인선 199 한연희 시집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희귀종 눈물귀신버섯

 


하이볼 팀플레이

셋이 모이면 셋 이상의 에너지가 쏟아져요

길쭉한 귀는 시종일관 쫑긋거리기 좋고
빨간 코는 반짝거리니 훌륭해
발이 닿은 지표면은 이렇게나 따뜻하니
뛰어다니기 좋은 계절이 왔도다

우리는 모두 주정뱅이 뱃속에서 기어나왔어요
쿵쾅거리며 뛰는 심장을 기억해요

태양은 우리 등뒤를 가볍게 밀어내고
믿음은 순식간에 타올라요
약속 따윈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우리는
희망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희망은 눈 코 입이 없는 것인데도
뺨을 쓰다듬는 토끼의 앞발을 닮고
포옹하는 내내 느껴지는 하마의 심박 같고
상징과 은유 속에서 넘실대는 키스 같아요

이렇게 웃고 떠드는 동안에
밤은 덥석 우리의 뒷덜미를 잡아채지만
손을 뻗으면 언제나 인기척을 내주는 이가 있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껑충껑충 철조망을 뛰어올라 묘기를 부리는 일
연필을 쥐면 수백 페이지를 금세 채울 수 있는 일
광장 안에서 시끄럽게 재잘대는 걸 멈추지 않는 일

시시콜콜한 일에 에너지를 쏟아내는 이를 보면서
알코올 도수가 제일 높은 걸 쭉 들이켰어요

반대로
망치를 휘두르는 놈은 제 손에 발이 으깨질 것이고
발길질하는 늙은 놈팡이는 뒤로 넘어져 머리통이 깨질 것이고
우리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금세 사라질 거라고 다들 말했지만

여자 셋은 단호해져서는
벌겋게 타오르는 얼굴로
불가항력의 토끼 간에 대해 자랑합니다

얼마나 세계가 정교하게 얽혀 있는지 이 메뉴판을 봐봐요
무지개 팀플레이를 보여주겠어요

그것은 체리를 띄운 맨해튼
라임과 으깬 얼음으로 채운 모스코 뮬
레몬과 소다를 넣은 산토리 하이볼

빨주노초파남보 칵테일을 나눠 마시며
다윈의 진화설을 증명하는 것이야말로
더는 억눌려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죠

위스키에 부어 넣은 약속과 보드카에 섞은 한숨을 마셔요
잔에 따른 미래가 일렁이면

괴괴하고 묘묘한 전술력 마지막 단계까지 단숨에 오르는 것입니다




괴괴하고 묘묘한 전술력의 팀플레이


늦여름, 오랜 고민으로 빚어낸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기념 삼아 뽑아든 시 한 편. 한연희 시인의 말에 따르면 어느날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술에 대한 시를 쓰기로 했고, 이 시를 써 갔지만 술 마시느라 읽진 않았다고 한다.  준비했으나 읽히지 않은 글들과 잔에 따른 미래의 일렁임과, 뛰어다니기 좋은 계절과 사람 이상으로 넘치는 에너지를 생각하면서. 단숨에 삼켜버리고픈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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