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랑
2024. 9. 4.

문학동네시인선 184 고명재 시집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노랑

 

 루드베키아라는 꽃에서 시작합니다

 그것은 노란 꽃인데요

 노랑은 독주를 넘길 때 목젖을 치는

 모든 술들의 지느러미 색입니다

 

 흔들어둔 샴페인을 누르는 엄지죠

 지문 밑에서 전갈자리가 간질거려요

 들리나요 개들이 흙길을 달리는 소리

 우리는 밤하늘에 탄산수를 엎지른 채로

 멀리 떨어진 별들의 재채기 소리를 들어요

 

 사과를 깎거나 귀를 파거나 참깨를 뿌릴 때

 재갈거리는 모든 소리에 노랑이 있어요

 당신의 개가 샛노란 털을 두르고 있죠

 노랑은 힘차고 당당합니다 절정을 내딛죠

 오늘은 창밖으로 이불을 터는 날

 

 귀와 귀를 붙잡고 황소를 타듯

 입술을 깨물고 힘차게 이불을 털면

 섬유의 파도 끝에서

 모서리가 열리는

 그 순간의 정점도 노랑입니다

 

 그러니 나랑 꽃 보러 같이 갈래요

 소리 없이 성냥을 켜는 법을 알아요

 머리가 무거운 꽃이 허청, 휘청거릴 때

 우리의 눈동자엔 혜성의 꼬리가 밝게 스치고

 손끝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나랑 같이

 책 보러 강에 갈래요

 

 콩나물처럼 머리를 밝히고 사랑을 말해요

 불상처럼 차분하게 눈감은 채로

 왼편으론 당신, 강물, 둔덕이 있고

 오른편엔 감자 같은 내가 있지요

 나는 그래요 그냥 있어요

 곁은 그런 것

 손 내밀면 확고한 형태로 있을 거예요

 수천 년을 건너온 은행나무처럼

 

 

 


소리 없이 성냥을 켜는 법을 알아요

곁은 그런 것

 

팟캐스트 시시알콜을 들으며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늦은 밤이면 작동하지 않는 신호등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지 어두운 때일수록 빛을 내야 하는 게 신호등의 역할이고 쓸모일텐데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고명재 시인의 사랑시가 좋다 꽃이 피든 안 피든 사랑하여서 시가 된 이야기들을 생각하며 불 꺼진 신호등이 보내는 환대를 받아들였다 산책은 생각이 다른 길로 가기에 좋다는 말이 이어폰에서 흘러나왔다

 

2024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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