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 문워크
2024. 8. 20.

문학과지성 시인선 589

<촉진하는 밤 _ 김소연 시집> 중에서

 

촉진하는 밤 _ 김소연 시집

 

 

동굴

 

 이쪽으로 가봐

 내가 가리키는 쪽으로 계속해서 가다 보면

 

 있어.

 분명히 있어,

 보일 거야,

 

 땀 없는 무더위처럼 계산대 없는 가게처럼 목줄 없는 강아지처럼

 슬픔 없는 울음이

 슬픔이 한 톨도 필요 없는 울음이

 

 잘 들어봐,

 들릴 때까지,

 그 울음에 춤을 춰봐,

 

 이미 도착했다고?

 너무 조용하다고?

 춤을 출 순 없다고?

 

 가져와보겠다고?

 더러워?

 만지지 못할 정도야?

 

 내가 갈게 가서 들을게 내가 가서 더러워질게

 조금만 기다려봐

 

 너는 거기서

 울음을 주머니 가득 넣고 모자처럼 머리에 쓰고 목도리처럼 친친 두르고

 등에 업고 가슴에 안고 둥실둥실 떠오르고 있었다

 

 울음이 너무 많네

 너무너무 많아져버렸네

 전부다 울음이 돼버렸네 이렇게나 조용히

 

 울음을

 슬픔이 한 톨도 필요치 않은 울음을

 주섬주섬 집어 들다가 나는

 너를 올려다보았다

 

 더러워진

 정말로 더러워진 너는

 씨익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기에 있자

 그래 그냥 그러자

 그래야겠다

 

 

 

문워크

 

 텅 빈 종이 봉지가 유유히 날아간다 텅 빈 주차장을 만끽하는 것 같다

 저쪽 끝에서 이쪽 끝까지, 몇 번의 스텝으로 유유히

 "뭐 하니" 하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그리고 저녁이 내려오고 있다

 

 보였던 것들이 하나씩 지워지고 있을 뿐인데도 무언가가

 끝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뒤로 걷고 싶다

 차차 누군가를 지나치고

 차차 누군가의 등을 잠시 바라보고

 차차 누군가가 멀어지고

 차차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누군가가 두 팔을 벌린 채

 내 등을 안아주려고 서 있는 데까지

 무사히 도착하고 싶다

 

 그는 저 멀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쪽으로 가지 말고 이리 와봐" 하면서

 영원히 나를 기다린 것 같다

 

 물론 앞으로 걸어도 좋을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은 멀리 있고 그를 조금 더 모른 척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다

 물론 좋을 것이다 앞으로 걷는 게 덜 우스꽝스러울 테니까

 

 나는 대체로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했고

 그래서 대체로 혼자 있고 싶어 했으니까

 지금부터 뒤로 걷는 거다 부드러운 스텝으로 저쪽 모퉁이까지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구두를 벗고 재킷을 벗고 콧수염을 떼는 거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기, 뒤로 걸어 나오기

 김소연의 시는 캄캄한 어둠을 닮은 사랑시 같다는 생각을 한다. 동굴처럼 깊고 밤처럼 짙은 어둠. 그 어둠은 이상하리만치 편안하게 느껴진다. 슬픔 없는 울음과 더러워진 웃음이 무구하다.

 

 어떤 날에 나는 너를 따라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울음이 너무나도 많아서 되려 조용하다.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다는 시인과 촌장의 노래, 가시나무 속 고백이 떠오른다. 이렇게나 조용히 불어난 울음 때문에 춤을 출 순 없을 것이다. 다만 더러워진, 정말로 더러워진 너는, 슬픔 없는 울음 때문에 정말로 더러워졌을까. 왠지 너의 우는 표정과 웃는 표정은 닮았을 것만 같다. 어쩌면 어둠 속에선 둘을 구별할 수 없을 지도 모르지. 그래 그냥 여기 동굴 속에 있자.

 

 저녁이 되면 더 이상 어둠을 자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차차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뒤로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가 끝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다짐을 한다. 밤은 조금 우스꽝스러워도 괜찮은 시간이니까.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닌, 멀리 있거나 뒤쪽에 있는 사람을 향해 걸어도 괜찮으니까. 영원히 나를 기다린 것 같은 누군가가 두 팔을 벌린 채 내 등을 안아주려고 서 있는 데까지, 지금부터 뒤로 걸어가는 거다. 부드러운 스텝으로 저쪽 모퉁이까지 그리고 모퉁이를 돌아 구두를 벗고 재킷을 벗고 콧수염을 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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