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룸
2024. 8. 21.

문학동네 시인선 214 안희연 시집 <당근밭 걷기> 중에서

 

당근밭 걷기 _ 안희연

 

 

코트룸

 

 맡기러 오는 사람이 있고
 찾으러 오는 사람이 있다

 

 나는 프런트에 앉아
 그들의 마음을 접수하는 일을 한다

 

 다른 계절을 찾아 여행을 떠나려고요
 지겹도록 저 자신이라는 사실을 벗고 싶어요

 

 오늘은 맡기려는 사람이 왔다
 나는 그에게 열쇠가 든 봉투를 건넨다

 문은 잠겨 있지 않지만 잠겨 있다고 믿는다면 열쇠가 필요할 것이다

 

 방안에는

 

 못 하나
 옷걸이 하나
 의자 하나

 

 이제 당신은 당신을 벗어 벽에 걸어둘 수 있다
 투명해질 수 있다

 

 물고기가 파도에 지치면 어떻게 하죠
 시간에 쪼아먹히는 기분이 들어요

 

 마음의 유속을 따라서

 

 반죽 이전의 손이여,
 나를 처음부터 다시 빚어줄 순 없는 건가요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떠내려가볼 수도 있다

 

 방문 목적에 따라 방의 구조는 재배열된다

 색을 먼저 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색을
 형태를 먼저 보고자 하는 이에게는 형태를 먼저 보여준다

 

 원하는 만큼 머물 수 있지만
 방안의 무엇도 밖으로 가지고 나갈 수는 없다

 

 당신은 들어올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방을 나선다
 다만 당신의 손은 어둠의 조도를 맞추는 방법을 배웠고
 믿음이 두 눈을 가릴 때에도 묵묵히 그 일을 한다

 

 

 


 

 

지겹도록 자신이라는 사실을 벗고 싶은 여름날엔

당근밭을 걸어보아요

마음의 유속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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