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수요일 #15. 다시 시작하는 마음
안녕하세요. 삼월의 첫 번째 수요일입니다. 조금씩 따뜻해지는 날씨에 힘입어 요즘 저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어요. 삼월의 초입. 몸과 마음의 회복을 도모하기에 좋은 때입니다.
겨우내 저는 취약해진 마음을 붙들고 있었어요. 혹한에 몸서리치고 무기력과 싸우면서 앞으로의 일보다 지나간 일들을 많이 생각했습니다. 지금이 일과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여기면서도 지지부진한 나날을 보냈어요.
아무래도 광고 만드는 일을 하다 보면 실패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아요. (대부분은 저의 미숙함 때문이겠지만요…) 경쟁 프리젠테이션에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고, 팔리지 못한 아이디어와 카피는 회의를 거듭할 때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거든요. 지난날의 실패를 안겨준 브랜드, 제품을 마주치는 순간은 늘어나는데 저는 그것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편입니다.
며칠 전엔 달리기를 마치고 우유를 마신 탓에 실패 하나를 기억해 냈어요. 덮어둔 기억을 맑은 정신으로 들춰보니 그날따라 스스로가 조금 우습더군요. 먼 훗날엔 실패를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가 더 늘어나 있겠지. 그렇게 되면 실패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될까. 아니면 무뎌지고 무뎌져서 그렇지 않게 될까.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런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어떤 안도감이 찾아왔어요. 실패에 대해 생각한다고 실패가 실패가 아닌 다른 게 되진 않는다. 다만 실패에 대해 생각할 때, 실패는 끝이 아니게 된다. 이런 결론을 내리면서 조금은 지난날을 긍정하게 되었습니다.
끝난 일도 완전히 끝은 아닐지도 몰라요. 삶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되기에 항상 다음이 있고, 다시 시작되는 것과 새로이 시작되는 일들이 있을 뿐이에요.
오늘은 저의 지난 달 동안 다시 시작하는 마음에 힘을 보태준 것들을 짧게 소개할게요.

📖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전 괴테가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이 모든 것을 말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도 괴테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그런 생각은 듭니다. 그게 저에게 힘이 되었어요.
모든 건 이미 말해졌어도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재미없지.
실패와 오류야말로 다양성의 근간이지요.
쉽게 잊히지 않을 이야기를 읽었다는 생각이 책을 덮는 순간 머릿속을 스쳤어요. 술술 읽히는 길지 않은 한 편의 소설이 삶을 탐구하게 해주었습니다.
모든 건 이미 말해졌어도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재미없지. 어쩌면 삶의 즐거움은 자신만의 언어와 문장과 목소리를 갖는 데에 있을지 몰라요.

🎥 센티멘탈 밸류 (Sentimental Value)
감탄을 자아낸 영화였습니다. 별 생각 없이 보았다가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어요. 영화 자체가 저의 취향에 가까웠긴 했지만, 칸 영화제 상영 직후 19분의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게 납득이 갈 수밖에 없는 섬세한 이야기였어요.
영화의 제목인 ‘센티멘탈 밸류’는 남들이 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자신에겐 뜻깊은 의미를 가진 것을 뜻한다고 해요.(나무위키의 설명입니다) 주로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거나 특별한 사연이 있는 물건. 그래서 도무지 버릴 수 없는 것들이 당신에게도 있나요?
그 여자의 슬픔은 그 사람의 어마어마한 일부 같아요
센티멘탈 밸류라는 제목처럼, 버리지 못한 한 사람의 슬픔을 영화는 다룹니다. 특별한 것은 슬픔에게 섣불리 손대지 않고 내면을 어루만지는 방식이에요. 이토록 인간적인 영화라니요. 영화가 개인의 슬픔을 이렇게까지 표현해낼 수 있다니요. 저는 이 영화를 모두가 꼭 보았으면 좋겠어요.

손톱에서 피가 나면 안심이 된다.
끝이 난 기분으로
지금 나는 일그러지고 있구나.
엄마에게 온 전화를 받지 않았다. 베개 옆에서 전화기가 떨림을 멈춘다. 어렸을 적 엄마는 손톱을 물어뜯지 말라고 혼내는 대신 매니큐어를 칠해주며 예쁘다, 예쁘다, 해주었다.
그때 모든 사람의 손이 나와 똑같이 생긴 줄 알았다. 내 새끼손가락이 사소한 기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었고 주먹을 완전히 쥘 수가 없어서 다짐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핑계를 대기 좋았다. 살점이 떨어지면 비치던 핏방울이 유일한 경고신호처럼 느껴졌고
창백하던 의사의 얼굴
거스러미
수염 자국
안경에 비친
어린 나
의사는 수술을 할 수 있지만 새끼손가락은 쓸모가 거의 없기 때문에 내버려두어도 그만이라고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새끼손가락보다 더 많은 걸 내버려두게 되었다.
자주 아프고 샤프심이 자꾸 부러지고 사람들은 말끝을 흐리고 잘못 쓴 문장에 두 줄 칠 수가 없다.
벌개진 손가락으로 천장의 전등을 가려보았다. 손가락 사이로 죽은 벌레가 가득 낀 빛이 사라졌다. 나타났다. 나의 새끼손가락은 손바닥 안으로 접을 수 없다. 내가 끝을 보지 못하는 것도 어떤 마음들을 미처 접지 못해서 그런 것 같았고 엄마가 한 번 더 전화를 걸었다. 그제야 몸을 조금 뒤척였다.
-
유선혜, 「물어뜯기」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
🔖 물어뜯기
영화 <센티멘탈 밸류>를 보고 이 시가 생각이 나서 시집을 다시 읽었습니다. 「물어뜯기」는 제가 아는 모든 시 중에서 가장 저의 개인적인 슬픔에 가까운 시예요.
내가 이런 사람이 된 건 몸 한 부분에 생긴 사소한 기형 탓이야. 저는 종종 이런 생각이 들고, 그럴 때면 생각에 깊게 빠지지 않으려 해요. 내버려두어도 그만인, 핑계를 대기에 좋은 그 사소한 기형 때문에 스스로를 물어뜯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죠. 그렇게 자란 사람은 ‘더 많은 걸 내버려두게’ 되기 쉽습니다.
이 시를 읽을 때면 화자의 마음을 알 것만 같은데, 모든 게 착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을 지나 퇴적되고 버릇처럼 굳어진 슬픔은 정말 ‘한 사람의 어마어마한 일부’가 되는 것 같아요.
…
이 시를 앞에 놓고 생각하니 어떤 말을 더 쓸지, 편지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긴 말 대신 최근 많이 들은 노래 한 곡을 담을게요. 때론 형언할 수 없는 것을 형언하려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년 3월 4일 수요일
정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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