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계절 관측표준목
2024. 11. 24.

11월 20일에 도착한 <우리는 시를 사랑해> 한정원 시인의 편지를 따라, 어제는 경희궁에 다녀왔습니다. 

 

 

 

[우시사] 나에게서 온갖 ‘처음’이 발생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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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서울에서 은밀하게 좋아하는 장소가 있어요. 왠지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곳이지요. 거창함이 없고 심심하니 저에게만 좋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우선은 경희궁과 그 안쪽 끝까지 들어갔을 때 만나는 산책길입니다. 크고 아름다운 궁이 지척에 두 군데나 있으니 아무래도 경희궁은 눈에 덜 띄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이곳은 여행객보다는 동네 주민들이 툭하면 들러 체조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한쪽에 앉아 신문도 읽는 공원 같은 궁입니다. 저는 그런 풍경을 그저 한갓되이 바라보다 옵니다.

 

 

 

다음은 경희궁에 이웃한 국립기상박물관인데요. 정말 귀띔하고 싶은 곳은 여기랍니다. 오르막길을 걷다가 잠시 멈추어 갈수록 트이는 풍경을 내려다보다가 하면 도착하는 곳.

...

그런데 무엇보다 제가 이곳을 말하는 이유는 앞마당에 있는 ‘계절 관측 표준목’ 때문이에요. 우리가 방송에서 ‘오늘 서울에 첫 벚꽃이 피었습니다’ 혹은 ‘첫 단풍이 들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알까 궁금하지 않았나요? 그렇게 선언하는 데에 기준이 되어주는 두 그루의 큰 나무가 이곳에 있습니다. 이곳 벚나무에 꽃이 세 송이 이상 피게 되면 첫 벚꽃이 되고요. 이곳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첫 단풍이 되는 것이지요.

 

‘처음’을 그렇게 정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싱거워 헛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절을 관측하는 것이 어떤 기계가 아니라 고목古木이라서 그게 참 허술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첫눈’이라는 것도 비슷합니다. 누군가는 마주치고 누군가는 놓치기 십상. 기상관측소에서 공식적으로 첫눈을 기록하더라도, 첫눈을 목격한 사람에게만 첫눈이 되는 것이니까요.

 

 

 

나에게서 온갖 ‘처음’이 발생하도록, 나에게서 자유와 사랑이 쏟아지도록. 내가 계절 관측 표준목이고, 내가 사랑 관측 표준인인 양. 참 싱겁더라도, 허술하더라도, 일단은 호쾌하게.

 

(우리는 시를 사랑해 176회, <나에게서 온갖 '처음'이 발생하도록> 중에서)

 

 


허술하더라도, 일단은 호쾌하게

 식물계절 관측표준목 단풍나무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한정원 시인의 말처럼 계절을 관측하는 것이 고목이라는 사실이 무턱대고 좋아서. 허술하지만 아름다운 어떤 기준에 따르면 지금 단풍은 절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곧있으면 첫눈을 맞이할테죠. 관측 표준목이라도 된 것처럼 처음을 기다리겠다고 다짐합니다. 허술하더라도 호쾌한 이 마음 덕에 더는 해가 넘어가고 나이가 들며 고목이 되어가는 것이 씁쓸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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