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극
2024. 9. 20.

여유와 설빈 3집, <희극>

 

 

여유와 설빈 - 희극 (2023.11)

 

1. 숨바꼭질 (Hide and Seek)

2. 너른 들판 (The Field)

3. 메아리 (Echo)

4. 희극 (Comedy)

5. 거울을 봤어요 (Self-Portrait)

6. 밤하늘의별들처럼 (Like the Stars in the Night Sky)

7. 시인과 농부 (Poet and Farmer)

8. 하얀 (White)

9. 푸른 (Blue)

 

 

 

[Full Album] 여유와 설빈 - 희극 (POCLANOS 유튜브)

 

 

 


노래의 힘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곡진한 음반이다. 좀처럼 멋을 부리지 않은 음악은 이미 알고 있는 어법으로도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한 장의 음반에 안타까움과 연민과 분노와 슬픔과 희망을 모두 담은 탓이다. 이 고단한 시대를 통과 중인 사람들의 간절한 고백 같은 이야기를 토로하는 여유와 설빈은 부서질 것처럼 여린 목소리로 뜨거운 노래를 부른다. 섬세한 편곡과 연주는 노래가 울컥이며 물결치게 하는 근원이다. 노래의 힘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삶을 지키는 노래의 역사가 이렇게 이어진다.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서정민갑

 

 

 

 

 선정위원의 말처럼, '곡진하다'는 단어가 이보다 잘 어울리는 앨범이 있을까. <희극>엔 우리가 이름 붙일 수 있는 생의 모든 감정들이 담겨 있는 듯하다. 여리지만 섬세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를 여러 가지 악기가 감싸는 형태로 음악은 흐른다. '노래가 울컥이며 물결치게 한다.' '노래의 힘에 대해 사유하게 하는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옮겨 적은 이 문장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희극>은 제주에서 만들어진 앨범이라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앞서 언급한 노래의 울컥임과 물결침은 제주의 바람과 파도를 연상케 한다. 작년 홀로 떠난 제주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끓어오르는 열과 싸우며 보낸 적이 있다. 그 고독의 시간. 처음 앨범을 접했을 때 나는 시간의 힘에 대해 사유하게 했던 제주의 가을을 떠올렸다.

 

 

 그때를 떠올리며 희극이라는 제목에 대해 생각한다. <희극>에 담긴 노래들의 분위기는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운 것 같은데. 왜 희극일까. 이 또한 우리 인생처럼 멀리서 보면 희극일까. 모르겠다. 그래도 멀리 갈 순 있을 것 같다. 한 시인이 시를 가리켜 '최소 언어로 최대한 멀리 갈 수 있는 형식'이라고 말한 것이 떠오른다. 멀리 갈 수 있다면 멀리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음악 중에서도 특히 포크 음악은 시와 많은 부분에서 닮아있는 것 같다. 최소한의 소리로 최대한 멀리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곡진한 음반이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엔 이런 문장이 있다.

 '음악은 정적의 아름다움에 맞서 그것에의 대결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음악의 창조란 정적의 아름다움에 맞서 소리를 소재로 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목표로 하는 데 있다.’

 

 

 좋은 음악은 정적의 아름다움에 맞서는 새로운 아름다움이다. 온전한 정적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 시대에서 여유와 설빈의 음악은 내게 큰 기쁨으로 다가온다. 희극적인 순간이다.

 

 

 

 


1. 숨바꼭질 (Hide and Seek)

꼭꼭 숨어라 들킬라 숨바꼭질 하자

누가 날 찾아줄까 기다리는 거야

좁고 작은 그 방의 문이 열리면

 

 

 

2. 너른 들판 (The Field)

우린 아무렇지 않은 척 살고 있어

부끄럽지 않은 척하기도 지쳐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 줘

저 너머의 빛을 봐야 해

연기 속엔 아직 불씨가 있고

너른 들판으로 뛰어가서

노래와 글 모두 태웠네

밤하늘엔 아직 별들이 있고

 

 

 

3. 메아리 (Echo)

세상은 너무 차가워요

식어버린 꿈처럼

노래는 허무로 가득 찬

메아리가 되었나 봐

 

 

 

4. 희극 (Comedy)

떠들고 떠돌다

축 처진 어깨에

날개를 달아주자

참 아름답고 천박해

수상한 세상에서

환멸을 느낄 때

멸망을 노래하자

오래된 낙서는

코메디라고 하자

 

 

 

5. 거울을 봤어요 (Self-Portrait)

난 알고 있어요

천사 같은 그 얼굴 뒤에

애써 삼킨 눈물과

꼭꼭 숨긴 괴물

난 살고 있어요

전쟁 없는 전쟁터 속에

 

 

 

6. 밤하늘의별들처럼 (Like the Stars in the Night Sky)

밤하늘의 별들처럼 밝지 않아도

바람 부는 날의 촛불처럼 난 살아있네

 

자유로운 영혼들은 길을 잃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을 잃었네

 

 

 

7. 시인과 농부 (Poet and Farmer)

시인은 슬픈 눈을 하고

농부는 아픈 손을 뻗지

신이여 여기로

삶이여 내게로

여기로 와주소서

내게로 와주소서

 

 

 

8. 하얀 (White)

하얀 물감

하얀 붓

하얀 도화지

하얀 세상

하얀 꿈

하얗게 또 하얗게

 

 

 

9. 푸른 (Blue)

세상에 없던 걸 만들겠다며 빛난 너의 눈에

다시 만나자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선다

푸른 푸르른 너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또 눈을 감았다

푸른 푸르른 너 바라보다가

나는 울음을 또 한 겹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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